역사 속으로

중국인한테 무시당하는 기분 아십니까?

coron 2012. 4. 10. 14:10

중국인한테 무시당하는 기분 아십니까?

Tim Kang(kall*****) | 2011-11-09 12:14 | 조회 319 | 답변 6

Daum 아고라 정치게시판에서 등록된 질문 입니다. 원문보기

관련분야 : 토론 > 정치

안녕하세요

 

제  룸메이트는 그냥   대놓고 무시하기  더러운  중국인이 잇습니다.

 

어느날 

 

저에게 

 

"한국역사는 얼마나 되니?" 

 

물엇습니다.

 

저는  5천년 정도로 알고 잇어서  사실  5천년 조금 안되는걸 (around five thousands) 말을 해?습니다.

 

근데 그 친구가 안 믿더라구요

 

사실  전 굉장히 중국인 안 좋아하고  중국인을 상대안할려고 하엿지만

 

차근 차근 설명을  해?습니다.

 

갑자기  예민한 쪽으로  묻기 시작하더라구요

 

월래 중국인들은  콕콕 약점만 경향이 깊이 잇습니다. (역사 왜곡,특히 고구려,완도 등등)

 

독립문 이야기를 하면서 

 

역사적으로 안 좋게 만들어질껀  비평하고  비꼬는 말투로  하는것에 대해서  

 

전 화를 참을수 없엇습니다.

 

개인적으로   애국자는 아니지만   한국을 사랑합니다. 

 

여러분들

 

한국 역사가 얼마나 되는지  영어로 된 사이트나   도움이 될만한 자료가 잇으시면

 

구체적으로 설명해실분들 계시면 도와주세요 

 

리플로 글 남겨주세요

 

감사합니다 ㅜ

 


  • 용현님 12.01.20

    한족은 몇번의 이민족의 지배를 당했는지 얼마나 수난을 당했는지 부각시켜주세요 중국사는 이민족의 침략의 역사이며 한족의 수난의 역사입니다 이점을 따끔하게 공격해주세요 또 까불면 여진족의 청조이후 단절되었던 이민족의 한족지배가 한국인에 의해서 시작된다고 말해주세요 댓글 | 신고
  • 강강이jjw님 11.11.13

    룸메이트 주소 제 지식 홈에 비밀글로 남겨주세요 댓글 | 신고
  • 강강이jjw님 11.11.13

    남기셨으면 댓글 다시고요 |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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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ξ알렉ξ | 답변 4698 | 채택률 89.6%

활동분야 : 그래픽 S/W (9위) | 영어 (40위)
본인소개 : 웹디자인소스카폐 플래쉬 강좌 및 질답지기 http://cafe....

영문판 위키페디아를 사용하세요. 영어로 모든 것이 다 일목정연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한국어판도 있긴 하지만, 영문판 자료랑 비교하면, 부실 그 자체이거든요. 영어로만 참조하는 것이라면

 

당연 위키페디아가 가장 추천이 됩니다. 단, 학문적, 공식적인 영향력은 없습니다.

 

위키페디아의 경우는 모든 사람들이 수정할 수 있다는 장점 및 단점이 있기 때문이죠.

 

(그런 것까지 신경 쓰신다면, 브리태니커를 권합니다.)

 

 

중국인들도 역사 잘 모릅니다. 개네들 역사교육은 우리나라 80년대식 교육이라서. 그저 암기력 테스트하거든요.

 

굳이 시비걸고 싶으시면, 기자조선이나 일본 식민지 이야기 꺼내시면 됩니다.

 

기자라는 사람이 한국쪽으로 갔는데, 정작 우리쪽에는 관련 문헌이 없죠. (있긴 한데 사대주의에 빠진 조선에서

 

그것도  중국쪽 자료보고 쓴 것들이고) 진시황이 불노초 구하라고 동쪽으로 보냈는데

 

이들이 일본으로 추측되는 곳에 도착해서 살았다고 일본도 중국 식민지라고 하거든요.

 

합리적으로 말해서 고작 1명 내지 천명단위로 해당 지역을 정복해서 잘 살 수 있을까요?

 

 

그리고 대판 싸우고 싶으면 티벳 건드리시고요. 티벳의 경우 중국 한족 영향력이 있었다가 없었다가 하는 지역이죠.

 

여기다가 원, 청 같은 나라는 니네 한족들이 지배당한 케이스잖니.

 

또, 한국전쟁때, 왜 항미원조라는 말도 안 되는 명분하에 참전해서 한국 갈라 놓은 것도 니네들 책임 아니니.

 

모택동 열심히 비난하셔도 되고요. 현재 중국 공산당 부폐 열심히 되지 않았니.

 

찾아보시면 건들어서 중국인이랑 대판 싸울 수 있는 소재는 많습니다. 

 

제가 보니깐, 정말 중화사상에 충만한 중국인을 만나신 것 같네요.

 

 

모든 중국인이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대만인도 있고, 홍콩인들도 있고, 또 본토출신이라도 개화된 사상을 가진 사람들도 있거든요.  일반화의 함정에는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냥 주변의 몇몇 못된 중국인들이 그렇다고 해서 모든 중국인이 그렇다고 결정을 내릴 수 없다는 겁니다.  한국인이라도 다 같은 생각, 사고방식을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제가 아는 중국 친구들은 모택동도 비난 할 줄 알고, 중화사상이 잘못된 것도 알고, 현재 중국 공산당 부폐 수준에 대해서도 우려할 줄도 압니다. 일반화의 오류만 범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좋은 중국사람도 있거든요. 중국인구가 너무 많아서 별라 별라 사람들이 다 있는 겁니다.

2011-11-10 05:11 | 출처 : 본인작성

질문자 한마디

(Tim Kang님)
감사합니다
  • 강강이jjw님 11.11.13

    틀린점이 있는데, 위키페디아를 수정할 수 있다면 우리가 수정하면 되고, 위만이 우리나라로 온 것 같습니다. 댓글 | 신고
  • 〃★ξ알렉ξ님 11.11.14

    그러니깐, 수정이 되니깐, 공신력이 떨어지는 것이죠. 우리가 수정도 되지만, 게네들도 수정을 할 수 있습니다. 또 전혀 다른 삼자들도 수정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쉽게요. 이점은 최신 정보를 반영한다던지, 좀 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반대로 너무 변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외국대학에선 위키를 참조문헌에 올리는 짓을 하지 않습니다. 기자 조선이랑 위만 조선이랑 전혀 다른 이야기이고요. 중국하고 조선의 사대주의자들이 믿는 부분이 은나라 말에 기자라는 사람이 동쪽으로 갔다는 것에서 나오는 기자조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위만하고는 전혀 다른 내용이죠. |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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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오(xx***) | 답변 54 | 채택률 70%

활동분야 : 해당 분야가 없습니다.
본인소개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짱골ㄹㅏ들의 착각 @.@


1. 수당 고구려전쟁에서 이건 쥐나 내부의 전쟁이지 국가간의 전쟁이 아니다


2. 쥐나 영토에있는 모든 국가 민족은 짱골ㄹ ㅏ다


3. 고려는 신라를 계승한 나라이다 그렇기때문에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가 아니다


4.고구려가 멸망한뒤 고구려유민들은 짱골ㄹ ㅏ들에게 흡수되었다


5.고구려는 쥐나 역사다 그렇기때문에 고려 고조선 조선 등은 쥐나 역사고 간도와 평양 개성등 북한 전국토는 쥐나 땅이다


그에 답변 즐~~~~~


1. 수나라와 당나라는 선비족 왕조로써 굳이 따지자면 흉노계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흉노계인 몽골족의 역사라 보는게 더 정확합니다.

즉 지금의 쥐나공산국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게다가 한족이란 유전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종족이라는 것이 이미 학자들에 의해 밝혀졌습니다.

서로 다른 연호를 사용하는 것만 봐도 서로 다른 국가를 알 수 있죠. 백만 단위로 총력전을 펼치는 지방정권이라...

그리고 짱골라들 말대로라면 신흥조직인 수와 당은 고구려에 반기를 든 반란세력이었군요....^^

즉 고구려는 중원대륙과 동북아를 모두 지배한 나라였다는 결론... 자가당착의 짱골라 ㅅㅐ끼들

 

2. 웃기는 ㄱㅐ소리입니다.

존재하지도 않는 짱골라에게 무슨 연고권이 있는지...

진시황의 진나라조차 서융 왕조이고, 요나라는 거란족 왕조, 금나라와 청나라는 부여계 말갈(=여진=만주)족 왕조,

원나라는 몽골족 왕조 등 티벳은 강족 왕조, 위구르는 돌궐 왕조 등 기타등등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짱골라는 그저 수천년동안 이민족들의 노예였을 뿐입니다. 

 

3. 고려는 처음부터 고구려를 계승한다고 표방해왔습니다.

그리고 한국은 굳이 따지자면 부여의 피가 더 강합니다. 원래 고향도 북방이었고....

고구려 인구가 500만, 백제 400만, 신라 200만이었다고 일단 치죠.

발해 인구가 400만이었다 가정하면

반도내의 신라는 북쪽 고구려계 100만, 남쪽의 백제계 400만 합치면 일단 500만으로 신라계 200만보다 배나 많죠.

그리고 고구려와 백제는 부여의 후손이죠. 고구려 원래 이름이 졸본부여에서 개명했던 것도 그렇고, 백제가 중간에 남부여로 개명했던 것도 그렇고... 거기다 백제는 아예 왕족의 성을 '부여'씨라 바꾸어 이어져왔죠. 

즉 남북국시대의 신라 인구 비율은

부여계 고구려와 백제 유민 500만 : 흉노계 신라 200만 으로 이루어졌다 할 수 있죠. 

남북국시대의 발해 400만까지 치면, 부여계(고구려,백제,발해) 900만 : 흉노계(신라) 200만으로 볼 수도... 

 

4 & 5.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짱골라 자체가 허구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흡수한다는 것인지...

하물며 당나라는 선비족 왕조인데....

간도는 한국 것이고 그 외의 만주지방은 청나라 즉 지금의 만주족 것이지 어떻게 짱골라 것이 된다는 것인지...

조약도 근세조선과 청나라가 맺은 것이지 짱골라의 쥐나공산국과는 아무 관련이 없죠..

노예족 짱골라 주제에 욕심도 너무 많아!!!

 

짱골라들도 자신들의 억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민족주의를 내세울 수가 없죠.

그래서 애국주의를 내세웁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미지수....

 

뭐 티벳이나 위구르, 내몽골 등 시위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도 보면 알 수 있죠.

 

빈부격차도 심하고 서로 다른 지방끼리는 대화도 잘 안 통하죠.

예로 광동어와 북경어는 완전 서로 다른 나라말이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지역간의 사투리가 서로간에 안 통합니다.

당연하죠. 원래 같은 나라나 같은 민족이 아닌데....

 

 

~~~~~~~~~~~~~~~~~아래 글은 daum 지식답변에서 발췌~~~~~~~~~~~~~~~

 

 

발해의 서쪽 강역문제는 요동의 지배여부와 집결된다. 이하 당나라의 요동지배는 중국 측 기록에 따른다하더라도 발해가 성립된 지 6년만인 714년 요서지방으로 완전 철수하였고, 여러 가지 정황으로 봐 그 이전에도 실제로 장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하 간단히 이에 관계된 자료들을 간추려 본다.

 


1. 안동도호부는 발해 건국 이후 요동에서 사라졌다.

 
1) 686년 보장왕의 손자 고보원을 조선군왕으로 봉해 안동도호부의 옛 주민(舊戶)을 맡겨 통치(統攝)하려 하였으나 끝내 실행하지 못했다.(구당서 고려전) ---- 이 때 발해가 성립된다.

 

2) 699년 또 보장왕의 아들 고덕무를 안동도독에 제수하여 본번(本蕃)을 통솔하게 하였다. 이때부터 안동(도호부)에 있는 고구려의 옛 주민이 점차 줄어들어 돌궐, 말갈 등으로 흩어지 자 고씨의 군장은 마침내 끊기고 만다.(구당서 고려전) ---- 발해가 성립된 후 형식적으로나마 안동도호부를 유지하려했으나 실패한 기록이다. 여기서 말갈 땅으로 간 고구려인들은 바로 발해에 흡수된 것을 말하며 적어도 이때부터는 요동반도가 발해 땅이 된 것이다.

 

3) 714년 - 당나라, 요서지방 평주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한다.

 
 
2. 732∼733 발해의 등주 공격 때 요동에는 당의 세력이 없었다.

 
 732년 9월 발해 장군 장문휴가 이끄는 발해 원정군은 바다길로 당나라 등주를 공격하여 등주자사 위준을 살해한다. 만일 가탐의 도리기에 나오듯이 압록강 하구에서 130리쯤 올라간 박작성이 국경선이라면 당나라를 침략할 대부대가 압록강 하구를 지키는 당나라군부터 무찔러야 했을 것이다. 발해 군이 현재 산동성인 등주를 공격하려면 반드시 압록강 입구를 떠나 해안선을 따라 항해하다 요동반도 끝에서 고군산 열도를 지나가야 한다. 만일 당나라가 요동반도를 차지하고 있었다 면 발해군의 대선단이 아무런 저항없이 등주를 공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요동반도 에 당나라 세력이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발해가 요동반도를 치지 않고 등주를 친 것도 요동반도를 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요동반도에 당나라 세력이 있으면 그곳부 터 쳤을 것이다. 발해는 해군의 출병과 거의 같은 시기에 육로로 요서지방을 공격하였다. 그러자 당나라는 문제를 일으켰던 대문예를 유주에 보내 군사를 모아 싸우게 하고, 유주 절도사가 [하북채방처치사를 겸임하도록 해 상주, 낙주, 패주, 기주, 위주 등 총 16개 주와 안동도호부(평주)의 병력까지도 통솔하게 하였다 (자치통감 권 213 당기 현종 개원 20년) 한편 당나라는 당나라에 와 있던 신라 왕족 김사란을 신라에 보내 남쪽으로부터 발해를 침공하도록 한다(삼국사기 권 8, 신라본기 성덕왕 32년 7월).

 

 
 
3. 요사 지리지에 반영된 요동반도의 발해 영토

 
 요동반도가 확실한 것만 몇 곳 간추린다(요사 권 38 지제8, 지리지 2, 동경도).

동경 요양부(東京 遼陽府) - 본래 조선(필자 주 : 단군조선)의 땅이다(本朝鮮之地). …… 당나라 고종이 고구려를 평정하고 여기에 안동도호부를 세웠는데 후에 발해 대씨의 소유가 되었다(唐高宗平高麗 於此置安東都護府, 後爲渤海大氏所有)

진주(辰州) 봉국군 절도 - 본래 고구려 개모성, 당 태종이 이세적을 만나 개모성을 격파 했다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발해가 개주(蓋州)로 바꾸었다.

노주(盧州) 현덕군 자사 - 본래 발해 삼노군이다. 옛날 5개 현으로 산양, 삼노, 한양, 백 암, 상암이었는데 모두 폐지했다. 철주(鐵州)는 본래 한나라 안시현이었는데 고구려 때 안시성이 되었다. 당 태종이 쳐들어 갔을 때 항복하지 않자 설인귀가 흰옷을 입고 성을 올라간 곳이 바로 이곳이다. .....발해 때 주를 두었는데 본래 위성, 하단, 창산 용진의 4개 현이다.

암주(巖州) 백암군 하 자사 - 본래 발해 백암성, 태종이 빼앗아 심주에 속하게 했다.

 

 

 

 

 

 

발해의 당 공격은 해상과 육로를 이용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해상 루트로는 압록강 하구에서 출발해 등주를 공격했고,육로로는 영주로 가는 길을 통해 거란과 가까운 마도산(馬都山)으로 내달아 당을 공격했다. 발해의 당 공격은 무왕 시기에 이미 요동반도가 발해 영역이지 않고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에서 발해 역사의 전모를 파악하는 데 의미가 크다.

 

http://blog.daum.net/hearo9mars/7072074

 

 

발해는 건국에서 멸망(698~926)에 이르기까지 228년간 15대를 이은 중앙집권적 왕조로서 독자적인 국가운영체제를 갖춘 독립국가였다. 1대인 고왕 대조영이 나라의 기틀을 마련한 뒤, 2대 무왕은 그 이름에 걸맞게 정복활동을 벌여 영토를 크게 넓혔으며, 그의 뒤를 이은 문왕은 발해 전체 역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57년간이나 나라를 다스리면서 내치에 힘을 모아 각종 제도를 정비하고 국력을 크게 신장시켰다. 그후 4대부터 9대까지 25년 동안 6명의 왕이 교체되는 일시적 내분기를 겪고나서는 10대 선왕에 이르러 다시 왕권이 강화되고 대외정복활동을 마무리하여 9세기 전반에 최대의 판도를 확보하여 다시 중흥을 맞이하였다.

발해의 건국과 영토확장 및 중흥의 주요 역군은 건국초기부터 고구려의 상무기풍을 물러받은 40만 강군이다. 이것은 8세기 전반 49만을 헤아리는 당나라의 군사력과 막상막하였다.
‘발해인 셋이면 호랑이 한 마리를 당해낸다.’ ‘풍속에 말타기와 사냥을 즐긴다’라는 사적의 기록은 무예를 숭상하는 발해인들의 용감한 기상을 전해준다.

발해와 당이 전쟁을 하게 된 계기는 당이 흑수말갈을 통해 발해를 견제하려 했던 사건에서 비롯한다.
대 문예는 다음과 같이 당나라 공격을 반대하였다. "흑수가 당의 벼슬을 청하였다 하여 그를 바로 치고자 한다면 이것은 당을 저버리는 것이다. 당은 사람의 많음과 군사의 강함이 우리의 몇 배나 되는데,하루 아침에 원수를 맺는다면 다만 스스로 멸망을 부를 뿐이다. 지난날 고구려가 강병 30여만으로 당과 맞서 복종하지 않다가,당병이 한번 덮치매 땅을 쓴 듯이 다 멸망하였다. 오늘날 발해의 인구가 고구려의 몇 분의 일도 못되는데,그런데도 당을 저버리려 하니,이 일은 결단코 옳지 못하다."고 대문예는 만류하였다. 그러나 무왕은 듣지 않았다. 참고로 발해 건국 초기의 인구는 78만명에 불과했으나 고구려 유민을 지속적으로 흡수하고 거란족과 말갈(=여진)족을 직접 통치하게 됨에 따라 전성기 시절 인구는 330여만명으로 늘어났다.

위의 기록을 통해 발해의 인구와 군사력이 330여만명-40만 강군이라면, 멸망시의 고구려는 발해의 인구와 군사력의 몇 배나 되는 대제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말기의 인구를 최소한 발해의 2배로 잡는다 하더라도 660여만명이라 볼 수 있고 그렇다면 고구려 전성기에는 1000여만 이상의 인구를 가진 대국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무왕은 결국 당나라를 응징하기 위해 732년에 그의 장수 장문휴(張文休)를 보내어 등주(登州,현 山東省 蓬萊)를 공격하면서 양국은 전쟁으로 치닫게 되었다. 이에 당 현종은 대문예를 유주(幽州)에 파견해 군사를 징발하여 발해군을 치게 하였다. 또 당나라에 묶고 있던 신라 김사란(金思蘭)에게도 신라 군사를 내어 발해의 남쪽 국경을 치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신라는 "마침 산이 험하고 날씨가 추운데다 눈이 한길이나 내려서 병사들이 태반이나 얼어 죽어 전공(戰功)을 거두지 못한 채 돌아 왔다."고 전한다.

무 왕은 몰래 동도(東都)에 사신을 보내 자객을 사서 천진교(天津橋) 남쪽에서 문예를 찔러 죽이려 했다. 하지만 실패하고 자객들은 모두 잡혀 죽었다고 한다. 무왕이 당을 공격할 수 있었던 것은 당에 대한 깊은 원한과 주변의 돌궐과 거란도 당과 대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발해 무왕의 당나라에 대한 응징 의지가 결정적이었다.

발해의 당 공격은 해상과 육로를 이용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해상 루트로는 압록강 하구에서 출발해 등주를 공격했고,육로로는 영주로 가는 길을 통해 거란과 가까운 마도산(馬都山)으로 내달아 당을 공격했다. 발해의 당 공격은 무왕 시기에 이미 요동반도가 발해 영역이지 않고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에서 발해 역사의 전모를 파악하는 데 의미가 크다.

이렇게 정연한 국가체제와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발해는 시종 당나라와는 나라 대 나라의 국가관계 차원에서 영활한 화전 양면의 전략전술로 응수해나갔다. 발해는 건국초기부터 당에 공동으로 대처하기 위해 거란 등 가까운 나라들과 동맹을 맺고, 전대인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원교근공’(遠交近攻: 먼데와 교섭하여 가까운 데를 치다) 정책의 일환으로 멀리 서천한 돌궐에 사신을 파견하기도 했다. 이에 위압당한 당나라 중종은 705년 특사를 보내 과거 고구려와 그 유민들에 대한 잘못을 사과하고 발해의 건국을 축하하는 한편 수교를 제안한다.

 

<신당서>가 전하는 바와 같이 발해는 자신들의 연호를 줄곧 사용했으며, 시호도 스스로 만들어 썼다. 문왕의 넷째 딸인 정효공주무덤에서 발견된 묘지명에는 왕을 ‘황상(皇上)’이라고 부를 정도로 발해는 당나라와 동격의 황제국이었다.
중국 지린성에서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고, 황제국을 지향했음을 알려주는 발해 황후의 무덤이 발굴됐다. 최근 중국사회과학원이 발간한 ‘고고(考古)’(2009년 제6기)에 실린 ‘발해왕실묘장 발굴 간보’에 따르면 2004~2005년 지린성 허룽시 룽하이 마을 룽터우산 고분군에 있는 발해왕실무덤에서 고구려 조우관(鳥羽冠)의 전통을 계승한 금제관식이 발굴된 것으로 확인됐다. 또한 발해국 3대 문왕(재위 737~793년)의 황후 효의왕후와 9대 간왕(재위 817~818년)의 황후 순목황후의 묘지(墓誌)가 출토됐다. 그런데 순목황후의 묘지에는 “발해국 순목황후는 간왕의 황후 태(泰)씨이다”라는 내용이 들어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한상 대전대 교수는 “출토된 금제관식은 고구려 조우관(새 깃털모양 관)의 전통을 잇고 있다”면서 “새 날개의 이미지를 세 가닥의 식물 이파리처럼 도안화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이는 당나라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순수한 발해산이며 고구려 조우관”이라면서 “여백을 끌로 쪼아 문양을 드러내는 ‘물고기알모양(魚字文)’을 활용하면서 발해 특유의 역동적인 분위기를 연출한 절정의 금속공예 문화 수준을 보여준다”고 극찬했다.

송기호 서울대 교수는 “발해가 고구려의 전통을 이으면서 황제국의 위상을 유지하였던 것으로 봐야 한다”며 “이는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정권에 불과했다는 중국의 동북공정 논리를 뒤엎는 자료”라고 설명했다. 참고로 당나라는 허구의 종족 짱골라의 왕조가 아닌 흉노계 선비족 왕조다.

당나라는 ‘울며 겨자 먹기’로 발해를 ‘해동성국’, 즉 바다 동쪽의 융성한 독립강국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융성은 14대까지 이어오다가 15대에 와서 거란의 내침으로 마감되고 만다. 그러나 요동반도에 끌려간 발해유민들은 ‘후발해국’이니 ‘대발해국’이니 하는 이름의 후계국들을 세워 부흥운동을 근 2백년 동안이나 벌인다.

 

신라와의 관계에 신경을 쓰던 일본은 발해의 동태를 알아보기 위해 720년에 자진해 사신을 파견한다. 발해는 아랑곳하지 않다가 당과 흑수말갈, 신라간의 밀착이 엿보이자 군사적 동맹 여부를 타진하기 위해 7년 후에 무관 출신의 사신을 보내 국교를 맺는다. 그 후 양국관계는 신속하게 발전하는데, 전기에는 주로 군사외교이나, 후기에 와서는 경제문화교류가 주류를 이루면서 일본에 대한 발해의 문화적 영향이 커진다.

<속일본기>를 비롯한 일본 사적의 기록과 일본에서 발견된 ‘발해사 목간’이나 ‘견(遣)고려사 목간’ 등 유물이 증언하다시피 두 나라간에는 11회의 사신교환이 있었으며, 문물교류도 상당히 빈번하였다. 871년 일본에 간 발해사신들이 첫날 관무역에서 얻은 이익만도 일본화폐로 40만 냥, 요즘 가치로 환산하면 6억 6천만엔이나 된다고 하니, 그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발해사신들은 일본 문인들과 작시를 주고받는데, 오늘까지 남아있는 발해 한시 10수 중 ‘밤에 다듬이 소리를 들으며’같은 9수는 이들 발해사신들이 지은 것이다. 발해악이 일본 궁중음악의 하나로 된 것도 이무렵이다.

발해문화는 당문화를 비롯한 여러 문화를 받아들어 융화시킨 독특한 복합문화다. 무덤양식에서 고구려를 계승한 돌무지 무덤이 위주이지만 당의 벽돌무덤이나 말갈의 흙무덤도 받아들였다. 당삼채를 본받아 삼채도기를 구워냈으며, 금 알갱이를 촘촘히 박는 서역의 누금기법으로 정교한 금속장식품들을 만들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발해 고유의 문화상도 역력히 나타나고 있다. 몇 사람의 뒤를 따라 여러 명이 빙빙 돌면서 노래하고 춤추는 답추(踏鎚) 춤이나, 연꽃잎 무늬에서 3국은 8개 잎을 기본으로 하는데 비해 6개 잎으로 꾸미는 기법을 쓴 것이 그런 사례다. 또 여러 명을 합장하고 그 무덤 위에 건물을 짓는 건축술 등도 발해만의 문화현상이다.

발해의 유물 중에는 몇가지 주목되는 것이 있다. 연해주의 옛 발해성인 노브고르데예프성 밖 취락지에서 은화 한 점이 발견되었는데, 앞면에 왕관과 함께 ‘부하라의 군주 짜르’란 소그드 문자가 새겨져있는 점으로 미루어 중앙아시아의 소그드 은화임이 확실하다. 교역수단인 이 은화는 북방 실크로드의 초원로와 연결되는 거란도(일명 ‘담비의 길’)를 따라 발해까지 유입된 것으로서 수만리 떨어진 두 지역간에 교역이 진행되었음을 시사한다.

 

또 한가지 신기한 것은 불교와 고대 동방기독교간의 융합모습을 보여주는 유물들의 발견이다. 발해의 솔빈부 아브리코스 절터에서 십자가가 발견되고, 동경용원부(현 훈춘)에서는 삼존불의 왼쪽 협시보살이 십자가를 목에 걸고 있는 상이 출토되었다. 그밖에 발해의 서변에 자리한 우순(撫順) 지역에서도 수백점의 십자가가 발견되었다. 그런가 하면 신라의 경주에서도 석십자가와 성모 마리아상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7세기 중엽 중국에 들어와 약 250년 동안 성행한 고대 동방기독교의 일파인 네스토리우스파(경교)가 9세기 전반 탄압을 받고 축출될 때, 발해 땅에 파급된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도 경교는 불교와 습합하는 방법으로 전파를 시도하였으니, 그 맥락에서 보면 발해에서 두 종교간의 융합관계는 이해가 될 것이다. 배타가 아닌 어울림의 문화를 꽃피운 발해인들의 슬기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이렇게 발해는 완비된 국가체제와 주권국가로서의 확고한 국제성을 지니고 사통팔달한 국제교통망을 통해 세계와 교류하고 문화를 주고받은 대제국이었다. 이러한 발해를 아예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지방정권 운운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용서못할 거역이고 오만이며, 우러 겨레에 대한 야멸찬 멸시에 다름아니다고 정수일 교수는 말한다.

또 홍콩의 발해사 학자인 김광석(金光錫.62) 홍콩 능인(能仁)서원 한국학과 교수는 중국의 발해사 편입 시도는 중화 패권주의에 다름아니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 교수는 지난 91년 홍콩에서 `발해족의 형성과 그 사회형태 연구'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해외 학계에서 처음 발해사 연구로 인정받은 한국학자다.

김 교수는 "`말갈(靺鞨)'이라는 부족명은 중국이 이민족을 경시해 붙여준 명칭"이라며 사실은 고대 한민족의 하나"라고 주장했다.
말 갈족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있었던 예맥계 속말말갈이 발해 건국에 기여했는데 속말수(粟末水.지금의 제2쑹화강)에서 유래된 속말말갈은 부여 계통으로 고구려와 혈연, 지역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우수한 철기문화를 자랑했다. 삼국시대에도 고구려는 오히려 말갈부족과 연합해 신라와 백제를 공격하는 일이 잦았다.
고구려 멸망후엔 고구려 유민들이 속말말갈 사회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발전의 계기를 맞았다. 속말말갈 외에 동옥저, 남옥저의 후예인 백산(白山) 말갈도 역시 예맥계로 발해 건국에 참여했다.

 

697년 대조영은 동모산(東牟山)에 성을 쌓고 스스로 진국왕(震國王)이 됐으며 713년엔 발해로 개칭했다.
발 해는 당시 나라명에 `국(國)'을 사용했다. 이는 자주독립 공동체였다는 의미이다. 당시 발해문자에 능통해 발해 외교문서의 번역을 맡기도 했던 시선(詩仙) 이백(李白)도 발해를 고려(고구려의 의미)나 백제로 부르며 외국으로 취급했다는 기록이 이백의 시문집 옥록총담(玉록<鹿+土>叢談)에 기록돼 있다.
이백의 혁만서(하<口+赫>蠻書)에선 또 당나라 사람들이 발해를 습관적으로 고려, 백제로 칭했다는 말이 나온다.

10세기초 발해는 귀족 권력투쟁과 국정 불안으로 사회모순이 커지면서 925년 거란의 야율 아보기(耶律 阿保機)의 침략을 초래한다.
1 년만에 홀한성(忽汗城)이 함락되고 애왕(哀王)이 투항함으로써 발해는 229년만에 역사에 종언을 고했다. 고구려계인 고영창(高永昌) 등에 의한 발해 부흥운동이 세차례 있었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아보기는 그러나 곧바로 발해국 영토에 동단국(東丹國)을 세우고 태자를 인황왕(仁皇王)으로 앉히며 발해국 계승을 선언했다.

당시 발해 유민 300여만명중 190만명은 동단국에서 거란의 직접 통치를 받았고 나머지 110만명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중 10만여명은 고려로 넘어갔고 60만명은 여진으로 도피했으며 1만명은 일본으로 망명하기도 했다.
왕족 2명, 귀족 25명을 포함 발해 유민이 대거 고려로 들어오자 고려는 이들을 후대했다. 고려 태조 왕건은 "발해는 본래 우리의 친척 국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김 교수는 "동단국은 이후 동거란으로 국명을 바꾸면서도 발해의 행정체제와 규모를 그대로 유지했다"며 사실상 동단국은 발해국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81&aid=0000090110&

발해는 거란 이후 동북지방의 주도세력이 된 여진과도 특수관계를 맺고 있었다.

http://weekly.donga.com/docs/magazine/weekly/2006/10/25/200610250500036/200610250500036_1.html

흑수말갈이 합류한 여진의 금나라는 당시 동북지구에서 최고 문명을 자랑하던 발해를 대거 포섭해 끌어들였다. 금나라의 역대 황제 가운데 발해족을 생모로 둔 황제는 해릉왕, 세종, 위소왕 등 3명에 이른다.

 

현재 북한 평양에 발굴 터와 건물 유구 일부가 보존돼 있는 8만6천여평 규모의 고구려 최대 정궁인 안학궁(安鶴宮)

안 학궁은 427년 장수 태왕이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옮긴 뒤 축조한 성으로 그 중심이 안학궁이었다. 안학궁은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뒤를 이은 장수태왕의 국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궁궐로, 우리나라 정궁 역사상 최대 규모다. 근세조선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 높이가 34m인데 비해 안학궁의 정전인 중궁은 87m에 이른다. 이곳에서는 높이 2m가 넘는 치미(기와장식품)가 발굴되기도 했다. 안학궁은 흉노계 선비족 왕조 당나라 최대 왕궁인 대명궁 함원전 67.5m보다 규모가 컸고, 건립시기도 200년이나 앞선 것으로 나타나 있다. 또 명(明)·청(淸) 시대의 궁전인 자금성 태화전은 60m에 불과하다.

자금성 태화전은 동서 60m, 남북 33m / 경복궁 근정전은 앞면 30m,·옆면 21m /
고구려 안학궁 - 남궁은 앞면 62m & 중궁은 앞면 87m, 옆면 27m

자금성(원래 9999칸이었고, 현재 8800여 칸)은 둘레가 3.52km이다.
반면 경복궁(원래 7481칸이었지만 현재 700여 칸이다. 경복궁의 일부가 일제에 의해 허물어졌고 현재는 10분의 1정도가 남아있다)은 둘레가 3.26km이다.

자 금성 안에 나무가 없는 것은 자객이 나무에 숨어 성 안의 사람을 공격할까 봐서이고 또 다른 이유는 궁 안의 나무가 황제의 위엄을 가린다고 생각해서이다. 그래서 겨울이 되면 나무 없는 자금성은 바람이 쌩쌩~ 불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자금성의 황제들은 겨울궁전을 따로 만들어 겨울에는 자금성을 떠나 겨울궁전에서 생활하며 집무를 보았다고 한다.

참고로 경복궁 근정전 내부가 신하들이 옥좌 앞에 도열해서 국사를 논하기에는 너무 좁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는데, 자금성 태화전 역시 신하들이 도열할 내부공간은 별로 없었다. 태화전은 가로로 길게 건설되어 배치되어있고 그 직각 방향으로 문이 있어서 옥좌가 그 방향으로 되어있으니까말이다. 웅장한 태화전도 옥좌 앞에서 출입문까지 별로 공간이 없었다. 둘다 조회나 의식에 쓰였고 신하들은 광장에 도열했던 거였다.

정치·문화적으로 볼 때 중원을 압도하며 동북아시아 최강국의 면모와 증거를 안학궁에서 깊게 엿볼 수 있다.
고 구려 문화는 당시, 한국을 넘어 동아시아 역사 전체의 중심문명이었다. 당나라의 왕릉, 궁성 유적에도 고구려의 영향은 드러난다. 역사학자이자 고고학자인 선문대 이형구 교수는 원인을 고구려 멸망 후 유민이 당나라에 유입되면서 문화선진국이던 고구려의 문화가 전파되었다고 말한다.

 

부여-고구려-백제가 비슷한 의복을 입고, 비슷한 음식에 비슷한 언어를 갖고 있었다는 기록이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으며 백제토기와 신라의 황금장식도 고구려 영향을 받은 것들이다.
또 발해의 상경성은 고구려와 당나라의 영향을 골고루 받았다. 당나라 장안성의 주작대로와 발해의 주작대로는 어디에서 영향을 받았을까? 고구려의 고분벽화에서도 엿볼 수 있는 사신도? 어쨌든 발해는 건축구조에서 온돌을 사용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서도 고구려의 문화가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발해는 고구려語 썼던 황제국”
동북아역사재단 ‘발해의 역사와 문화’ 펴내

발 해사에 대한 국내외 학계의 최근 연구성과를 집대성하고 있는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김용덕)이 최근 발간한 ‘발해의 역사와 문화’는 발해가 독자적인 연호와 시호(諡號)를 사용하고 스스로를 황상(皇上)으로 칭하는 ‘황제국’이었음을 밝혔다. 한마디로, 발해가 자주적 왕조였음을 학술적으로 규명한 것이다.
동북아역사재단의 연구위원 등 22명의 관련 분야 전문가를 비롯, 중국·일본·러시아의 학자까지 참여한 책은 발해의 각종 제도 및 외교관계, 사회, 문화에 대해 전반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책의 주요 논지를 소개한다.

◆ 발해는 자주적 왕조국가였다 = 특히 발해가 독자적인 연호와 시호를 사용했음을 중국의 정사(正史)인 ‘신(新)당서’에서도 인정하고 있다. 신당서는 이같은 발해의 움직임에 대해 ‘사사로이’ 한 것이라며 불쾌감을 표시하는 한편 발해의 자주성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발해는 황상을 자칭하는 황제국이었으며, 대외적으로도 일본에서 스스로를 부여의 풍속이 남아 있는 ‘고려국’이었음을 자칭했다.

◆ 발해는 고구려어를 사용했다 = 발해가 국제 교류에서 고구려어를 사용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새롭게 제기됐다. 고광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기록에 의하면 서기 739년 발해 사신 이진몽(已珍夢) 일행이 일본에 당도, 이듬해 정월 조회에 참석했는데 발해 사신과 함께 ‘신라학어(新羅學語)’라는 통역사가 나란히 서 있었다고 한다. 신라학어란 언어를 배우고자 신라로부터 일본에 파견된 학생으로 발해 사신의 통역을 담당하기 위해 배석한 인사였을 것이다. 이는 발해 사신과 신라학어의 언어가 서로 소통 가능했기 때문에 취해진 조치로서, 발해 사신이 신라어와 통하는 고구려어를 사용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의 사정으로 보면 발해 - 통일신라사이에는 하나의 민족으로 보는 정신적 흐름이 분명히 발견된다. 통일신라(統一新羅)는 발해를 북조(北朝), 또는 북국(北國)이라고 명백히 지칭하고 있다(『삼국사기』권 10 「신라본기」; 권37 지리지). 이 당시에도 상당한 공통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통일신라가 발해에 대하여 북조(北朝)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우리가 한반도 북쪽을 북한(北韓)이라고 부르는 것과도 다르지 않다. 즉 통일신라는 발해와 현재는 대립하고 있지만 결국은 통일이 되어야할 동족(同族) 전체의 일부라는 의식이 있었다.

참고로 인구학적으로 범위를 최대로 좁혀서 따진다면 남한은 신라의 후예라기 보다는 부여의 후예가 더 정확할 것입니다. 고구려와 백제 및 발해는 모두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국가들이죠. 뿐만 아니라 현재 대한민국의 국명은 코리아로 불립니다. 이 역시 거슬러 올라가자면 고구려에서 유래된 말이죠.
인구 비율로 따져도 신라의 인구보다는 고구려와 백제 계통의 인구가 훨씬 더 우세했습니다.
실 제로 삼국시대 신라의 인구는 백제의 인구 절반도 채 안 되었습니다. 다만 당나라의 개입으로 반도를 차지할 수 있어서 그렇지. 당나라의 개입이 없었다면 신라는 오히려 고구려-백제 연맹에게 복속되었을 겁니다. 그러니 남북국시대 신라의 인구에서 신라계는 적었습니다. 오히려 신라에 병합된 한반도 이북과 이남에 있던 고구려-백제계 백성들이 훨씬 더 많았죠.
이것이 나중에 중세고려가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 발해의 국제교역로 = 발해가 ‘일본도(道)’ ‘신라도’ ‘등주도’ ‘영주도’ ‘거란도’ 등 다섯 개 교통로를 국제교역로로 이용했음을 사료를 통해 밝혀냈다. 특히 윤재운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발해는 선박의 규모가 최대 300t에 이르는 해상무역의 강국이었다”며 “당나라에 120여 회, 일본에 34회의 공식 외교사절단을 파견했을 정도로 해외 교역도 활발했다”고 말했다.
참고로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의 산타마리아호는 150t의 카라크선(carrack 船)이다.

이외에도 임석규 조계종 연구원은 발해의 토기와 자기가 고구려의 것으로부터 시작해 당의 영향을 받았음을 규명했고, 전현실 박사는 발해의 주거문화가 고구려의 온돌 형식을 발전시킨 것임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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