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퇴서 전문
http://blog.naver.com/silviakm/40004430084
<도올 방송사퇴서 '국민여러분께 아룁니다'-발췌-> ----조선일보 22일자 21면---- 강의는 학문의 소산입니다. 그것은 최소한 타인에게 전달치 않고서는 배길 수 없는 애절한 충동이 계속 나의 내면으로부터 끓어오를 때만이 그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강의가 비록 폭넓은 공감을 얻고 있다하더라도 권위화되어가고, 찬반의 희롱물이 되어가고, 시세의 상품이 되어가며, 반복의 나락 속으로 떨어져가고 있다면, 우리 사회 전체의 건강을 위하여 깊게 숙고해봐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강의는 통상적으로 텔레비젼이라는 매체를 통하여 전달할 길이 없다고 생각되었던 조직적이고 고등한 학문의 체계를 아주 비근한 삶의 체험을 통하여 재미있고 쉽게 전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현재 나의 강의 방식이나 그 분위기는 최적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나에게 주어진는 하등의 압박감이나 부자연스러움이 부재합니다. 저를 못견디게 만들고 있는 중요한 사실은 저 자신이 제 강의로 인하여 권력화되어가고 있으며, 이러한 권력구조 속에서 도올 김용옥이라는 인간이 소외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 자신의 실존 속에 온축되어가고 있는 권력을 부정하는 길만이 우리 모두가 사는 길이라는 엄숙한 양심의 명령 앞에 나는 무릎을 꿇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도피가 아닙니다. 이것은 정당한 단절입니다. 예로부터 한 선비가 자신이 권력화되어가고 권력을 추구하는 자들의 도구화되어가고 있는 것을 감지할 때는 아무 이유없이 지위를 사양하고 낙향하거나 은거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우리 유학의 유구한 전통입니다. 저는 이제 저의 강의를 침묵으로써 다시 시작하려 합니다. 학문의 본령은 역시 자기의 앎의 축적의 선행에 있으며, 연찬하는 삶의 자세에 있습니다. 학자의 본무로 복귀하려 합니다. (2001년 5월 21일 아침 무정재에서)
참, 안타깝고 실망을 안겨주는 기사였다. 이 한번의 돌발적인 잠적은 그동안의 공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그동안 도올이 논어를 강의하면서 강조한 것이 인과 예이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입에 발린 말뿐이었음을... 그는 논어를 동서양의 다양한 식견을 입히며 오늘날의 화두로 불러오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그동안 그 스스로 계몽적인 강의라 누누히 강조하더니만- 결국 그 스스로는 몸소 모범이 되지 못하고 뱀꼬랑지가 되어서 말고 말았다. 도올의 이 돌연한 잠적은 결국 그 스스로가 지어낸 오만의 장벽을 스스로가 감당하지 못하였던 것이라 여겨진다. 강의란 가르침이란 무엇인가? 강의의 한자어는 講義로 講자를 파자해보면 말씀언과 짤구, 義자는 뜻의 또는 옳의의. 따라서 강의란, 뜻이나 옳음을 언어로 형상화시켜 보여준다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한 사람의 내부에 축적된 지식을 시혜적인 입장에서 대중에게 전해주기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의 말대로 '타인에게 전달치 않고서는 배길 수 없는 애절한 충동'을 언어로 형상화시키는 가운데 그 스스로의 정신도 체계적으로 구체화되어지고 새록새록 유연한 안목으로 깨어났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권위화되어가고, 찬반의 희롱물이 되어가고, 시세의 상품이 되어가며, 반복의 나락 속으로 떨어져가고 있다'고 하는 그의 변명 같은 시인은 그의 오만으로 비롯되었던 것은 아닐까? 그의 강의 무대에 그와 평소 교류가 있었던(그에게 동감하는) 이들을 초대하긴 했어도 그를 반박하는 이들을 불러 같이 서서 대질해보지 못하고 '한무리 소인배로다!' 폄하해버리며 넘어간 그 스스로 세운 방어벽. 아무리 드넓은 호수라도 흘러나가기만 하고 흘러들어오지 못하면 마르기 마련이잖겠는가. 그의 학문이 그의 애절한 충동이 마르지 않는 샘처럼 끝없이 100회까지 흘러갈 수 있었을텐데... 그 스스로도 학문이란 유연한 감각 감성을 일깨워가며 자신을 열어가는 거라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의 오만은 그를 그의 세계에만 가두고 그에게 흘러들기 위하여 끊임없이 일어나는 물줄기들의 노크와 기세를 외면해왔었다. 그리고는 그의 안에 고여있었던 물만을 흘려보내고 있었던 건 아니었던가? 인기나 권력은 물거품인 것. 누가 그리 도올에게 기대고 우상화했단 말인가? 그 스스로 권력화되어간다고 추상적으로 포장하지말고 강단에서 그 문제를 조명하며 논어의 말씀을 살폈더라면 어떠한가? 권력화되어가고 권위화되어감을 느꼈다면 얼마든지 대중 앞에서도 그 연유를 토해보며 경계할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이 다시 권위화된다면 진정한 권위의 모범이 되었지 않았겠는가? 스스로 진단하고 스스로 경계해가며 자연히 생겨난 권위는 사회의 멋진 가늠자가 되지 않겠나? 이리 허심탄회하게 자신의 고민까지도 가르침의 발판으로 삼을 수 있었다면 소외되어질 도올이 어디있겠나? 오늘날 결혼식이 신과 주례자와 신랑신부 그리 수직적인 신고라면, 옛날 우리 신부집에서 치르는 혼례식 즉 친영은 마당에서 둥그렇게 싸고있는 모두가 주례자인 수평적 신고라며 그 수평적 관계와 수평적 열린 사회를 그 스스로 부르짖지 않았던가마는... 하지만, 정작 도올 그 스스로는 자신은 고차적 지자로서 저차적 대중을 계몽하고 있다는 수직적 위상을 스스로 고수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인해 대중 앞에 자신을 드러내고 함께 고민해본다는 게 가당찮았던 것일까? 가르침이란 무엇인가? 바로 가르키며 쳐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거기엔 가르침을 주는 자와 받는 자의 차별을 두지 않으며 누가 가르키던 그 지향을 위해서 나도 너도 쳐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도올은 우리를 시원하게 쳐주기는 했지만 그 속에서 자신을 쳐가는 건 잊고 있지는 않았을까... 그리 더불어 함께 쳐가며 이루어가는 힘을 그는 믿지 않는것인가. 아니면, 그 자신을 드러내놓기가 싫어서 함께 쳐가길 마다하고 자신만의 세계에서 그리 자신을 쳐 가겠다는 것인가. 솔직히 난, 대중 앞에 단 10분이나 떠들 수 있을까? 그리 미천한 내가 누구를 비난하고 비판할 수 있겠는가마는 도올에 대한 기대가 컸으므로 실망이 컸던 것이다. 그에 대한 기대란 것이 그의 인문학적 지식체계나 어휘력은 아니었다. 난 그의 눈빛과 그의 땀, 그의 침에 반했었다. 나보다도 한참 고령인 그의 열정이 그러할진데... 일주일에 한번이지만 그를 볼 때마다 난 발심이 새록새록 돋아났고, 내 부끄러움과 마주할 수 있었다. 교육이란 단순히 지식의 전달이 아니었다. 지식의 전달이라면 책에 의존하면 되는 것이지 왜 교단의 선생님을 필요로 하겠는가? 단순히 콕 집어내주는 쪽집개 요령을 배우기 위하여는 더욱 아니다. 우리 교육의 일그러진 단면일 뿐. 진정 가르친다는 것은 바로 자신의 열정을 자신의 충동을 새로운 가슴 가슴에 심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배운다는 것은 바로 그 열정을 그 충동을 끌어 안는 것이다. 선생님들의 침을 많이 맞을수록 좋다는 것은 바로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그 에너지를 더욱 크게 전해받을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 자신이 말하지 않았던가? 격물 치지 성의 정심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 이 팔조목의 실천함에 있어 선후의 선결적 관계가 아니라고 제가하는 속에 수신이 있고 치국하고자 함에 수신이 다져지고... 또한 수신 속에 격물과 치국 등 그 안팎을 함께 일구어가는 동시적 실천의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고... 헌데, 지금 그는 '학문의 본령은 역시 자기의 앎의 축적의 선행에 있으며, 연찬하는 삶의 자세에 있습니다.'며 번복하고 있으니... 지금까지의 자신을 부정하는 소치이다. 김홍겸의 강의가 생각난다. 김홍겸의 한의학 강의도 센세이셔널한 붐을 일으켰다가는 그 말미에선 몹시 지치고 잠겨드는 목소리를 읽었었다. 하지만 약속한 마지막 강의까지 스스로를 다그치고 기름이 소진하여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완결하고자하는 정성이 그 유종의미를 거두었었다. 이에 비해 신명없는 강의를 약속이란 시간의 끈으로 계속 잇기보다는 모든 설왕설래를 감수하며 물러날 때 알아서 물러난다는 도올. 이는 용단이라기보다 너무 약삭한 건 아닌가? 인은 극기복례라 했더니만... 누구나 슬럼프는 있고 매너리즘이란 마를 겪게 마련이다. 도올은 자신의 강의가 관성화되고 반복의 나락으로 추락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을까. 신바람과 신명이 있었던 강의가 계속 진행해갈수록 축 느러지고 지지부진 답보화되어 나락으로 잠기는 것을 그의 오만은 견딜 수 없었겠지. 하지만 그 지지부진을 뚫어내고 화룡점정을 향해 스스로를 다졌어야 했을 때 그는 자신의 잃어버린 初心을 찾아올 생각은 하지 않고 이 절정의 단맛만을 안고 안주하려 한다. 그것이 진퇴의 시기를 아는 仁者이기라도 한듯이... 너무나 안타깝다! 그 찬반을 모두 아우르며 진행했더라면 그의 충동과 열정은 더욱 타올랐을 거고 그의 호수는 마르지도 않으며 새로운 물을 계속 흘려보낼 수 있었을 텐데... 결국 그 그릇의 한계인가... 仁이란 초라해지는 자신을 견디며 사랑해내는 힘이 아니겠는가? -속물이 구만리 장천을 나는 대붕의 뜻을 어찌헤아리까마는...-
요즘도 그렇겠지만 얼마전에 학교 대란이 있었지요. 학교붕괴.... 교사들은 설자리를 잃었다고 통탄하고,학생들은 배울 스승이 없다고 등 돌리고,부모들은 그래도 학교는 다녀야 되는데 자식 맡길곳이 마땅치않다며..난리 법석을 떨었지요.... 언젠가 친구와 그런 화두로 얘기를 한적이 있었는데.... 저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선생이면 교단에서 생을 마감 할거면 그 어떤 바람에도 흔들려서는 안된다고 생각 했습니다. 학생이란 스스이 이끌면 따라가게 되있고 제아무리 난다긴다해도 스승없는 제자는 없습니다. 학생이 무서워서 피한다....말이 안되지요.... 아이들은 아이들일 뿐입니다.... 다만 교사와 부모가 아이들이 뭘...어떤 사랑과 가르침을 원한다는 것을 간과한것 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희때도 전인교육이란 명분아래 학굔지 감옥인지 모를 정도로 힘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친구가 아니라 경쟁의 대상으로만 만들어 버리는 학교에 누가 정이 가겠습니까? 아이들도 사람인데 그런 압박을 지금까지 버티어 온것이 신기 하지요..... 물론 시절이 달라지고 매스컴에서 핫뉴스로 다뤄서 그 파장이 더 커진감은 있지만 곪으면 썩게 마련이고 상처는 아물게 마련이며...흉터만 남겠지요.... 그 흉터를 보면서 잊지는 말아야 겠지요.... 처음부터 잘못되지는 안았겠지만 변화하는 세태에 발맞추지 못한 정책도 어른들의 생각도 문제 였겟지요..... 이제라도 올바른 학교가 된다면 더할나위 없이 다행한 일이겠지요...좀더 창의적이고 다양한 인재를 길러내느데 주력 해야 겠지요..... 도올의 대해서는 잘은 모르지만,말이 많은것은 사실 입니다..... 어차피 강단에 섰으니 참된 가르침,인내가 어떤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면 금상첨화 였겠습니다만은,그의 강의를 더 듣고 싶어하는 이들에게는 안타깝고 배신일 거라고 생각 합니다... 그러나,본인이 자신의 함정의 빠져서 힘겨워질때 남을 돌아볼 여력은 없죠....그점에선 대학자도 어쩔수 없는 모양 입니다....오히려 많이 아는게 화근 인가 봅니다.... 인기 연예 프로도 100회를 넘기기 힘듭니다.... 수많은 스탭들이 달라 들어도 욕은 먹기 마련이죠..... 너무 준비없이 시작하지 않았나 생각 합니다... 분명 도올의 얘기는 지금 세상에서는 신선한 충격 이었죠, 그런데 그런 생각을 했답니다... 몇백년동안의 유교 역사를 지녀 내려온 민족이 지금 저얘기를 듣고 처음 듣는 것처럼 멍한 얼굴들 입니다.... 우숩지요....제 자신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왜 이렇게 될수밖에 없었는지는 역사에 나와 있으니 더 말할 필요가 없겟죠.... 제 소견으로는 사람은 아무리 많이 알고 그 학문이 체계화 되어 있다고 해도 딜레마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유야 많겟지만 심리적으로나 신체적인 허약성도 무시 할수는 없겠지요..... 그러나....씨앗은 뿌려 놨으니 물을주고 잘 가꾼다면 열매가 맺겠지요.... 아마 도올이 해야 할일이 씨뿌리는 일이었지 안나 싶습니다.... 저마다 자기가 해야 할 일들이 있듯이 도올은 자기가 해야 할일을 다 하지 안았나 싶습니다.... 세상에 자기의 학문을 뿌렸으나 거두는 사람은 따로 있겠지요..................... : <도올 방송사퇴서 '국민여러분께 아룁니다'-발췌-> : ----조선일보 22일자 21면---- : 강의는 학문의 소산입니다. 그것은 최소한 타인에게 전달치 않고서는 배길 수 없는 애절한 충동이 계속 나의 내면으로부터 끓어오를 때만이 그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 이런 강의가 비록 폭넓은 공감을 얻고 있다하더라도 권위화되어가고, 찬반의 희롱물이 되어가고, 시세의 상품이 되어가며, 반복의 나락 속으로 떨어져가고 있다면, 우리 사회 전체의 건강을 위하여 깊게 숙고해봐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 나의 강의는 통상적으로 텔레비젼이라는 매체를 통하여 전달할 길이 없다고 생각되었던 조직적이고 고등한 학문의 체계를 아주 비근한 삶의 체험을 통하여 재미있고 쉽게 전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현재 나의 강의 방식이나 그 분위기는 최적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나에게 주어진는 하등의 압박감이나 부자연스러움이 부재합니다. : 저를 못견디게 만들고 있는 중요한 사실은 저 자신이 제 강의로 인하여 권력화되어가고 있으며, 이러한 권력구조 속에서 도올 김용옥이라는 인간이 소외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 자신의 실존 속에 온축되어가고 있는 권력을 부정하는 길만이 우리 모두가 사는 길이라는 엄숙한 양심의 명령 앞에 나는 무릎을 꿇게 되었습니다. : 이것은 도피가 아닙니다. 이것은 정당한 단절입니다. 예로부터 한 선비가 자신이 권력화되어가고 권력을 추구하는 자들의 도구화되어가고 있는 것을 감지할 때는 아무 이유없이 지위를 사양하고 낙향하거나 은거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우리 유학의 유구한 전통입니다. : 저는 이제 저의 강의를 침묵으로써 다시 시작하려 합니다. 학문의 본령은 역시 자기의 앎의 축적의 선행에 있으며, 연찬하는 삶의 자세에 있습니다. 학자의 본무로 복귀하려 합니다. : (2001년 5월 21일 아침 무정재에서) : : : 참, 안타깝고 실망을 안겨주는 기사였다. : 이 한번의 돌발적인 잠적은 그동안의 공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 그동안 도올이 논어를 강의하면서 강조한 것이 인과 예이지 않았던가? :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입에 발린 말뿐이었음을... : 그는 논어를 동서양의 다양한 식견을 입히며 오늘날의 화두로 불러오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 -그동안 그 스스로 계몽적인 강의라 누누히 강조하더니만- 결국 그 스스로는 몸소 모범이 되지 못하고 뱀꼬랑지가 되어서 말고 말았다. : : 도올의 이 돌연한 잠적은 결국 : 그 스스로가 지어낸 오만의 장벽을 스스로가 감당하지 못하였던 것이라 여겨진다. : : 강의란 가르침이란 무엇인가? : 강의의 한자어는 講義로 : 講자를 파자해보면 말씀언과 짤구, 義자는 뜻의 또는 옳의의. : 따라서 강의란, 뜻이나 옳음을 언어로 형상화시켜 보여준다는 데 있을 것이다. : 그러나, 이는 한 사람의 내부에 축적된 지식을 시혜적인 입장에서 대중에게 전해주기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 그의 말대로 '타인에게 전달치 않고서는 배길 수 없는 애절한 충동'을 언어로 형상화시키는 가운데 그 스스로의 정신도 체계적으로 구체화되어지고 새록새록 유연한 안목으로 깨어났을 것이다. : 그렇지 않고 '권위화되어가고, 찬반의 희롱물이 되어가고, 시세의 상품이 되어가며, 반복의 나락 속으로 떨어져가고 있다'고 하는 그의 변명 같은 시인은 그의 오만으로 비롯되었던 것은 아닐까? : 그의 강의 무대에 그와 평소 교류가 있었던(그에게 동감하는) 이들을 초대하긴 했어도 그를 반박하는 이들을 불러 같이 서서 대질해보지 못하고 '한무리 소인배로다!' 폄하해버리며 넘어간 그 스스로 세운 방어벽. : 아무리 드넓은 호수라도 흘러나가기만 하고 흘러들어오지 못하면 마르기 마련이잖겠는가. : 그의 학문이 그의 애절한 충동이 마르지 않는 샘처럼 끝없이 100회까지 흘러갈 수 있었을텐데... 그 스스로도 학문이란 유연한 감각 감성을 일깨워가며 자신을 열어가는 거라 하지 않았던가? : 하지만 그의 오만은 그를 그의 세계에만 가두고 그에게 흘러들기 위하여 끊임없이 일어나는 물줄기들의 노크와 기세를 외면해왔었다. : 그리고는 그의 안에 고여있었던 물만을 흘려보내고 있었던 건 아니었던가? : 인기나 권력은 물거품인 것. : 누가 그리 도올에게 기대고 우상화했단 말인가? : 그 스스로 권력화되어간다고 추상적으로 포장하지말고 : 강단에서 그 문제를 조명하며 논어의 말씀을 살폈더라면 어떠한가? : 권력화되어가고 권위화되어감을 느꼈다면 얼마든지 대중 앞에서도 그 연유를 토해보며 경계할 수 있을 것이고. : 그것이 다시 권위화된다면 진정한 권위의 모범이 되었지 않았겠는가? : 스스로 진단하고 스스로 경계해가며 자연히 생겨난 권위는 사회의 멋진 가늠자가 되지 않겠나? : 이리 허심탄회하게 자신의 고민까지도 가르침의 발판으로 삼을 수 있었다면 소외되어질 도올이 어디있겠나? : 오늘날 결혼식이 신과 주례자와 신랑신부 그리 수직적인 신고라면, 옛날 우리 신부집에서 치르는 혼례식 즉 친영은 마당에서 둥그렇게 싸고있는 모두가 주례자인 수평적 신고라며 그 수평적 관계와 수평적 열린 사회를 그 스스로 부르짖지 않았던가마는... 하지만, : 정작 도올 그 스스로는 자신은 고차적 지자로서 저차적 대중을 계몽하고 있다는 수직적 위상을 스스로 고수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인해 대중 앞에 자신을 드러내고 함께 고민해본다는 게 가당찮았던 것일까? : : 가름침이란 무엇인가? 바로 가르키며 쳐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거기엔 가르침을 주는 자와 받는 자의 차별을 두지 않으며 누가 가르키던 그 지향을 위해서 나도 너도 쳐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 도올은 우리를 시원하게 쳐주기는 했지만 그 속에서 자신을 쳐가는 건 잊고 있지는 않았을까... : 그리 더불어 함께 쳐가며 이루어가는 힘을 그는 믿지 않는것인가. : 아니면, 그 자신을 드러내놓기가 싫어서 함께 쳐가길 마다하고 자신만의 세계에서 그리 자신을 쳐 가겠다는 것인가. : : 솔직히 난, 대중 앞에 단 10분이나 떠들 수 있을까? : 그리 미천한 내가 누구를 비난하고 비판할 수 있겠는가마는 : 도올에 대한 기대가 컸으므로 실망이 컸던 것이다. : 그에 대한 기대란 것이 그의 인문학적 지식체계나 어휘력은 아니었다. : 난 그의 눈빛과 그의 땀, 그의 침에 반했었다. : 나보다도 한참 고령인 그의 열정이 그러할진데... : 일주일에 한번이지만 그를 볼 때마다 난 발심이 새록새록 돋아났고, 내 부끄러움과 마주할 수 있었다. : 교육이란 단순히 지식의 전달이 아니었다. 지식의 전달이라면 책에 의존하면 되는 것이지 왜 교단의 선생님을 필요로 하겠는가? 단순히 콕 집어내주는 쪽집개 요령을 배우기 위하여는 더욱 아니다. 우리 교육의 일그러진 단면일 뿐. : 진정 가르친다는 것은 바로 자신의 열정을 자신의 충동을 새로운 가슴 가슴에 심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배운다는 것은 바로 그 열정을 그 충동을 끌어 안는 것이다. : 선생님들의 침을 많이 맞을수록 좋다는 것은 바로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그 에너지를 더욱 크게 전해받을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 : 그 자신이 말하지 않았던가? : 격물 치지 성의 정심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 이 팔조목의 실천함에 있어 선후의 선결적 관계가 아니라고 : 제가하는 속에 수신이 있고 치국하고자 함에 수신이 다져지고... 또한 수신 속에 격물과 치국 등 그 안팎을 함께 일구어가는 동시적 실천의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고... : 헌데, : 지금 그는 '학문의 본령은 역시 자기의 앎의 축적의 선행에 있으며, 연찬하는 삶의 자세에 있습니다.'며 번복하고 있으니... 지금까지의 자신을 부정하는 소치이다. : : 김홍겸의 강의가 생각난다. : 김홍겸의 한의학 강의도 센세이셔널한 붐을 일으켰다가는 : 그 말미에선 몹시 지치고 잠겨드는 목소리를 읽었었다. : 하지만 약속한 마지막 강의까지 스스로를 다그치고 기름이 소진하여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완결하고자하는 정성이 그 유종의미를 거두었었다. : 이에 비해 신명없는 강의를 약속이란 시간의 끈으로 계속 잇기보다는 모든 설왕설래를 감수하며 물러날 때 알아서 물러난다는 도올. : 이는 용단이라기보다 너무 약삭한 건 아닌가? : : 인은 극기복례라 했더니만... : 누구나 슬럼프는 있고 매너리즘이란 마를 겪게 마련이다. : 도올은 자신의 강의가 관성화되고 반복의 나락으로 추락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을까. : 신바람과 신명이 있었던 강의가 계속 진행해갈수록 축 느러지고 지지부진 답보화되어 나락으로 잠기는 것을 그의 오만은 견딜 수 없었겠지. : 하지만 그 지지부진을 뚫어내고 화룡점정을 향해 스스로를 다졌어야 했을 때 : 그는 자신의 잃어버린 초심을 찾아올 생각은 하지 않고 : 이 절정의 단맛만을 안고 안주하려 한다. : 그것이 진퇴의 시기를 아는 仁者이기라도 한듯이... : : 너무나 안타깝다! : 그 찬반을 모두 아우르며 진행했더라면 : 그의 충동과 열정은 더욱 타올랐고 그의 호수는 마르지도 않으며 새로운 물을 계속 흘려보낼 수 있었을 텐데... : 결국 그 그릇의 한계인가... : : 仁이란 초라해지는 자신을 견디며 사랑해내는 힘이 아니겠는가? : : -속물이 구만리 장천을 나는 대붕의 뜻을 어찌헤아리까마는...- :
'도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올의 교육 입국론 (0) | 2014.06.25 |
---|---|
공자의 생애와 사상 도올 논어 (0) | 2012.06.10 |
도올 논어 7강 고주와 신주 (0) | 2012.06.10 |
도올 논어강의 제사와 동학 & 개벽 요약 노트 [스크랩] (0) | 2012.06.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