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이야기의 무대는 바로 티베트!
제임스 힐턴의 1933년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은 모든 이들이 늙지도 병들지도 않으며 고통을 모르고 행복하게 살고 있는 낙원, 샹그릴라를 소개한다. 그런데 이 낙원이 좀 기괴하다. 힐턴의 상상력에 따른다면 샹그릴라는 18세기 초 룩셈부르크에서 온 가톨릭 수사가 히말라야의 깊은 산중 어딘가, ‘푸른 달’이란 이름을 가진 8천 5백 미터의 고봉 아래 사원을 세운 이래 비로소 낙원이 되었다. 비행기 추락으로 샹그릴라에 들어오게 된 영국인 콘웨이의 기록을 옮기는 형식을 취한 소설은, 샹그릴라의 기원인 이 사원에는 오하이오 아콘에서 만든 미국제 욕조와 그랜드피아노가 있고 큼직한 도서관이 마련되어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여하튼 소설가의 상상력임에도 불구하고 샹그릴라의 소재지는 소설 밖에서 심심치 않게 갑론을박이 되어 왔다. 중국은 각지에서 참여한 전문가들과 학자들이 장장 9개월 동안을 연구, 조사한 끝에 윈난성의 짱족(티베트족) 자치주인 중뎬(中甸)이 샹그릴라임을 확신하고 2001년 현의 이름을 샹그릴라로 바꾸었다. 이 점에 이견을 제시하는 학자들은 파키스탄 국경지대에 위치한 훈자계곡이 샹그릴라의 소재지라고 주장하기도 하는 등 또 다른 이설들이 회자 된다. 물론 대부분은 관광상품의 개발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늙고 병들고 번민하고 다른 모든 인간들처럼 평균수명을 전후해 죽어 간다.

힐튼의 『잃어버린 지평선』의 표지. 소설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 말은 지상의 어딘가에 존재하는 유토피아를 가리키는 보통명사가 되었다.
『잃어버린 지평선』이 발표된 지 20년 뒤, 히말라야의 낭가파르바트봉을 등정하기 위해 인도로 떠난 오스트리아 출신의 산악이 하인리히 하러(Heinrich Harrer)가 제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겪은 흥미진진한 모험담이 등장했다. 1939년 하러는 등정을 위해 인도에 도착하지만 때맞추어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통에 영국군에게 체포되어 적국인 억류 수용소에 갇히게 된다. 호시탐탐 탈출을 시도하던 하러는 1944년 5월 동료들과 함께 인도 국경을 넘어 티베트에 발을 딛는 데 성공했다. 티베트의 이곳저곳을 전전하다 1946년 5월 순례자들 틈에 끼어 라싸(Lahsa)에 도착한 하러는 열한 살 어린아이였던 14대 달라이 라마의 눈에 띄어 그의 선생이 된다. 1950년 라싸를 떠나 오스트리아로 돌아온 하러는 1953년 자신의 경험을 담아 「티벳에서의 7년」(Seven Years in Tibet)이란 제목의 책을 펴냈다.

하인리히 하러는 40여 개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었으며, 오스트리아에 티베트에 대한 박물관을 설립하기도 했다.
서구적 편견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하러의 책은 그동안 서구에 밝혀진 바가 드물었던 티베트에 대한 실상을 전달하는 최초의 또한 신뢰할 만한 자전적 기록문학이었다. 젊은 산악인 하러가 이국땅에서 수용소에 갇히고 탈출에 성공한 후 거칠고 이국적인 풍광을 모험적으로 가로질러 라싸에까지 진입하는 모험담은 독자들의 흥미를 소설 이상으로 자극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하러의 책이 거둔 성공은 이 책이 모험담 이상이었기 때문이었다. 독자들은 그동안 서구에는 금단의 땅으로 남아있던 티베트의 도시 라싸와 포탈라궁,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 사람들에 대해 국외자로서 냉정하고 세심한 관찰이 배어든 하러의 사실적 르포르타주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45년 뒤인 1997년 장 자크 아노가 하러의 원작을 토대로 같은 제목의 영화를 내놓았을 때 하러는 여전히 생존해 있었다. 그런 하러가 영화를 보고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무척 궁금해지는 이유는 영화가 하러의 기록을 심각할 정도로 훼손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싸의 재봉사인 페마 라키를 두고 하러와 아우프슈나이터가 벌이는 애정의 삼각관계는 없었던 일이고, 극 중에서 하러를 괴롭히는 아들 그리고 전처에 대해서라면 하러는 자신의 책에서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다. 아우프슈나이터와 페마 라키의 결혼 또한 사실 무근이다. 허구적 인물이거나 허구적 사건이거나 이쯤에서 그친다면 영화적 각색으로 여기면 그만이다. 그런데 장 자크 아노는 심각할 정도로 더 나아가기로 작정한다.
「티벳에서의 7년」에서 장 자크 아노는 티베트에서의 중국을 조지 부시의 악의 축에 맞먹을 정도로 그리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보인다. 1949년 혁명 후 비행기를 타고 라싸에 나타난 중화인민공화국 대표단은 포탈라궁의 달라이 라마를 접견하는 자리에서 승려들이 중국 대표를 환영하기 위해 며칠을 걸려 수놓은 만다라를 군화로 짓밟아 뭉개며 지나간다. 또한 고압적이고 건방진 태도로 달라이 라마를 옥좌에서 끌어내리는 것도 인민해방군 군인의 임무(?)이다. 어린 달라이 라마의 총기 어린 설법에도 불구하고 궁을 나서며 인민해방군 장군이란 작자는 “종교는 독약이야”라는 고답적인 말을 던진다. 그런데 하러의 책에는 이 모든 것들이 등장하지 않거나 또는 등장할 수 없었다.

이 영화를 보며 중국 인민해방군의 행동에 분노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이 사건 자체가 아예 일어나지 않았었다면? 영화 속 재미(?)를 위한 설정이라고만 넘기기엔 조금 찜찜하다.
1956년 이전까지 라싸에는 활주로가 없었기 때문에 그게 누구라도 비행기를 타고 나타날 수는 없었다. 1954년 달라이 라마가 베이징으로 갈 때에도 육로를 이용해야 했다. 중국 대표단을 환영하기 위해 ‘만다라’를 수놓았다는 사실 자체가 허구이거니와 그걸 짓밟고 지나갔다는 것 또한 날조일 뿐이다. 그보다 텐진 가쵸(Tenzin Gyatso)가 14대 달라이 라마에 즉위한 것이 1950년 11월이었으니 중국 대표가 아직 정치적 최고 권력자로 볼 수 없는 달라이 라마를 접견하겠다고 찾았을 리도 없다. 또한 중국 대표를 맞은 자리에서 달라이 라마는 부처의 말씀에 따른 평화와 생명 존중, 살생하지 않음이 티베트인의 본성이라고 말하지만, 하러가 머물고 있던 1947년 라싸에서 벌어진 전임 섭정 레팅 린포체에 의한 쿠데타는 종격은 물론 박격포까지 동원한 내전이라고밖에는 달리 표현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레팅이 그의 사원에서 체포되자 그를 지지하는 승려들이 병력을 조직해 반란을 일으켜 라싸를 향해 진군하면서, 이 신성한 도시는 대혼란에 휩싸여야 했다. 승려들의 반란이 진압된 후 라싸는 온통 총탄과 포탄 자욱 그리고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고 하러는 적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이 달라이 라마가 아니 장 자크 아노가 말하는 티베트인의 본성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
당시 중국의 정책은 ‘티베트의 평화적 해방’으로, 협상을 위해 군사적 진공을 멈춘 것이 사실이다. 중국이 티베트에 제안한 것은 중화인민공화국에의 귀속과 티베트의 현상 유지 및 자치의 보장이었다. 인민해방군은 또 점령지에서 썩 훌륭하게 행동해 인심을 얻었다. 죄수들을 석방하고 도로를 닦았으며 음식과 기타 모든 물품에 대해서는 비용을 지불했다. 또 사회주의적 선전도 잊지 않았다. 이 또한 중국공산당이 혁명 당시 늘 해오던 일이었다. 결국 유엔에 개입을 호소하는 등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라싸의 카샥은 중국과의 협의에 응했다. 1951년 5월 양측 대표는 중국의 제안을 골간으로 작성된 ‘17개조 협의’에 서명했다.
1951년 ‘17개조 협의’가 성사된 후, 티베트는 원래의 신정체제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계급체제도 유지되었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의 우산 아래에서 승려와 귀족계급들은 자신들의 기득권과 안위를 보장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결국 직면하게 될 토지개혁은 기존의 지배체제를 근본에서부터 허물 것이 분명했다. 장 자크 아노의 「티벳에서의 7년」에서는 섭정인 차롱이 무기와 탄약을 없애 버리지 않았다면 게릴라들이 계속 싸울 수 있었을 것이라며 푸념을 토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차롱의 말 그대로 티베트의 지배계급들은 은밀하게 무장투쟁을 준비했다. 무기와 탄약은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중국형명 후 중국에 대한 사보타주에 나선 미국의 CIA는 윈난에서 패주한 국민당군 잔당과 함께 티베트의 지배계급에게 자금과 군수물자를 제공했다. 1959년 무장봉기는 그런 가운데에서 가능했다. CIA와 연락을 책임진 것은 14대 달라이 라마의 형인 걀로 통굽과 투탄 노부였다. 무장봉기가 실패로 실패로 돌아간 후 달라이 라마의 인도로의 망명을 주선한 것 역시 CIA였다. CIA의 지원과 망명정부의 게릴라 투쟁은 그쯤에서 끝나지 않았고 미국의 지원이 완전히 끊긴 1969년까지 네팔과의 접경인 무스탕과 왈랄충-골라 지역에서 계속되었다.

하인리히 하러는 14대 달라이 라마인 텐진 가쵸와 우정을 나누었다. 하러는 서양의 문물을 가르치는 달라이 라마의 '스승'이기도 했다.
인민해방군이 라싸를 침공해 점령군처럼 거만하고 고압적으로 행동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이 영화는 역사적 사실을 날조하고 있는 셈이다. 또 하러에 대해서 말한다면 그가 1950년 11월 라싸를 떠나기 전까지 인민해방군은 단 한 명도 라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영화에서 인민해방군의 점령 치하가 된 라싸의 상황에 대해 분개하는 하러는 실존인물인 하러와는 무관하다.
왜곡이거나 날조이거나 장 자크 아노가 원작을 무시하면서까지 영화를 반중·티베트독립 선전영화의 수준으로 만든 것에 대해서는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이게 장 자크 아노의 문제일까. 그건 그렇지 않다. 영화 「티벳에서의 7년」은 서구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국제사회에 공고하게 뿌리박고 있는 티베트에 대한 고정관념, 중국이 평화와 독립을 원하는 티베트를 무력으로 침공하고 삼켜 버렸다는 인식을 환기시키는 동시에 재생산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영화가 전하는 이런 메시지는 고답적이기 짝이 없다. 평화와 사랑을 신봉하는 달라이 라마는 다행스럽게도 공산주의의 침략을 피해 인도의 다람살라(Dharamshala)로 망명했고 여전히 티베트의 평화적 해방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다. 양심적 국제사회는 그런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의 독립을 지지하고 후원해야 할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내가 시답잖게 여기는 말 중의 하나인데, 세상만사 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봐야 알(믿을) 수 있다'가 사실에 훨씬 가깝다. 보여 줌에 뿌리를 두고 있는 영화를 내가 좀더 신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거짓조차도 보여 줌 앞에서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항용 허점을 드러낸다. (…) 물론 영화가 모든 것을 알려 주지는 않는다. 늘 그렇지만 진실은 스크린이 아니라 자신의 손 안에 놓여 있다. 진실을 자신의 손 위에 올려놓으려면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애정을 가져야 하는데, 종종 영화가 그 길에 이르는 관문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영화가 직접 길을 떠나도록 부추기는 힘이 되기도 한다.
─ 유재현, 『시네마 온더로드』, 「머리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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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원작 번역본 구하고 싶은데 ㅠㅠ 도통 구할 수가 없네요.
아...그렇군요. 제가 좋은 정보를 드리면 좋은데, 안타깝습니다.
혹시 정보를 입수하게 되면 꼭 블로그를 통해 말씀드릴께요. ^^
좋은 내용에 관심이 있어 내용을 스크랩 하였습니다. 출처를 밝혔으며 주소를 링크 걸어두었습니다. 부디 노여워 하지 마시길...
안녕하세요 시아님.
이 글로 책에 대한 관심도 촉발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안녕하세요?
엊저녁 영화를 다운받아 보고나서 납득이 안가는 부분이 많아서 검색하다가 우연히 이곳을 찾게 되였습니다. 단순 흥행을 목적으로 왜곡된 영화를 만들어내는 미국같은 나라 정말 경멸하게 되는군요. 저런 영화 한편때문에 이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인식을 가지게 되였는지 생각해 봅니다. 그래도 과감히 진실을 밝혀내는 지인분들이 있음으로하여 세상은 밝아지지 않을까 합니다.
건강하시고 항상 행복이 깃들기를 두손 모아 빕니다 ~
달빛님 반갑습니다.
오늘 본 드라마에서 이런 대사가 나왔던 게 기억이 납니다.
세상을 어둡게 하기도 하고, 밝게 하기도 하는 것이 무어냐는 질문의 답은 바로 '눈꺼풀'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보는 그만큼, 우리가 보려고 하는 그만큼이 보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의 시야가 조금씩 조금씩 넓어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블로그에서 자주 뵈어요~
저명한 역사학자이자 인류학자인 Carole McGranahan 의 Arrested Histories 라는 책이랑 Jamyang Norbu 가 쓴 에세이 Warriors of Tibet 을 한번 읽어보시길. 중국이 강압적으로 나오지 않았다는 견해에 반대합니다. 단순히 영화만 가지고 논하자면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가 아니기때문에 픽션이 많이 가미된건 맞지만 역사만을 놓고 봤을때 중국이 개혁과 정책을 들고 티벳에 찾아왔을땐 결코 평화적이지 않았습니다. 확실히 처음 1950년에 중국이 티벳을 방문했을때 본색을 숨기고 님이 말씀하신대로 돈을 많이 푼건 사실이나 1956년부터 시작된 수없는 수도원 파괴 (Chatreng, Naryong, Lithang, Bathang, etc)라든지 티벳인들뿐 아니라 다른 중국에 분포한 다른 소수민족들 (Lolo라든지)에게 강압적으로 행해진 struggle sessions, criticism sessions, model cizicen 같은 비인간적인 정책들을 무시할수 있을까요? '노예'라는 단어는 중국이 티벳인들에게 개혁을 강요했을때 썼던 단어입니다. 본인들의 민족탄압을 '노예해방'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했지만 찾아보시면 티벳 귀족, 농민, 유목민 (비교적 가난했던 계층), 계층에 관계없이 아주많은 증언들이있답니다. 일제시대때 이득을 본 소수 친일파가 없지않았던것처럼 그 증언들중 소수는 지금처럼 중국밑에 있는것이 그 전에 자치국이였을때보다 낫다고 하기도 하죠. 그걸 티벳인 모두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보시면 안될것같습니다.
아, 그리고 만다라를 군화로 짓밟은건 모르겠으나 (중국의 행적으로 보아 충분히 있었을법하다고 생각합니다. 영화에서 나온 그 특정 장소와 시간은 아니어도) 수도원에 승려들로 하여금 부처와 다른 신들의 초상화들을 직접 짓밟게 한적은 있습니다. 종교와 정부, 일반적인 삶, 문화가 모두 하나도 연결되어있는 티벳인들에게, 특히 수도원에 승려들에게 이게 무슨 의미인지 해아려보시길 바랍니다.
종교/불교를 독이라고 한적은 없을지 몰라도 공식 발표에서 종교는 사람에게 있어서 아편과도 같다고 했었죠. 1956년까지는 절대 티벳 종교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사람들을 안심시켜놓고 경계풀고 그 사람들 반 강제적으로 데려다가 도로건설, 활주로건설에 쓴다음 태도를 바꿔 1956년부터 1958년까지 서서히 공식 발표를 바꿔나갔습니다. 제 생각엔 영화에서도 감독이 다큐멘터리가 아니기때문에 감독의 네러티브를 불어넣어서 실제로 있었던 일을 시간과 장소와 인물들을 네러티브에 맞게 재구성하여 표현한게 아닐까 싶네요.
Erica님 안녕하세요.
어떤 역사적 사건이든 '객관적'이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사건을 바라보고, 기록하는 사람의 주관(입장)이 사건을 대하는 태도에 포함되어있다고 보기 때문이지요. 그런 점에서는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거짓이냐를 논의하는 것은 무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취하고 있는 선-악의 구도는 너무 명백합니다. 그 시선 자체가 너무 서구적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제작한 사람들이 서구인이기 때문에 당연할지 모르겠습니다만...'티벳인은 짓밟힘 당하는 불쌍한 민족-도움이 필요하다, 중국인은 짓밟는 악당-무찔러야 한다'는 이분법이 너무 손쉽게 이루어지는 것 같달까요. 영화의 재미나 구성을 위해 어떤 내용을 손쉽게 왜곡할 수 있다는 점을,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Erica님의 소상한 댓글이 저에게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
먼저, 과제로 '티벳에서의 7년'이라는 영화를 보고 블로그에 올리신 글 잘 보고 갑니다.
다만 미국에서 티베트 불교를 전공하는 학생으로써, 또 티벳의 역사 및 문화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한명의 티벳독립 지지자로써 몇가지 짚어드리고자 합니다.
위에 댓글을 쓰신 Erica 님께서 하신 말씀과 같이 헐리우드 영화라는 점을 고려해보아서 하인리히 하러의 원작 자서전과는 많이 다른 픽션이 가미되었음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만 글쓴이께서 이 영화를 propaganda라고 정의하시면서
하나의 치명적 오류를 범하신 것은 바로 엄연한 당시 중국 공산당 정권의 인권탄압입니다.
실제로 집계될 수 없는 수많은 티베트인의 목숨들이 중국의 "문화혁명"(Cultural Revolution) 동안 죽어갔으며 수많은 사원 및 문화재들이 손실되었습니다.
또한 지금 현재 티베트 자치구에 남아있는 티베트 인들의 문화 및 얼을 지우고자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지요. 비구니승들의 강간, 사원의 훼손, 티베트 종교 및 언어의 억압등 실로 일어나는 일들은 유엔 및 국제기구에서도 인정하는 바와 같이 매우 비인간적이며 탄압적입니다.
영화에서의 대사처럼 "이런 천국에서도 역사는 반복되고" 있습니다.
티베트내에서의 문화억압 정책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사실상 대한민국이 독립되기 이전 일본 강점기 시대의 모습과 아주 유사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언어를 말살하고자 하는 등, 문화를 억압하고자 하는 등 티벳의 역사는 우리네의 그것과 매우 비슷합니다.
중국 공산당이 티베트를 무단점령했을시에 국제사회에서 이 문제에 관해서 지나치게 무관심했던 것은 바로 비슷한 시기에 대한민국 반도에 한국전쟁이라는 국제적이고 이데올로기적으로 큰 이슈를 몰았던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복되는 역사와 함께 대한민국은 티베트의 운명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부디 이 블로그를 보고 지나치는 많은 분들이 사실을 왜곡되게 알지 않고 진실을 바라볼 수 있는 독립적인 분들이 되셨으면 합니다.
안녕하세요 Jennifer님.
티베트불교를 전공하시는군요! 그래서인지(응?) 댓글에 티베트에 대한 애정이 듬뿍 묻어납니다. ^^
이 글은 『시네마 온더로드』의 「티벳에서의 7년」편을 발췌한 것입니다. 발췌때문인지(ㅠㅠ) 오해가 생기는 것 같은데요~ 본문의 내용은 중국이 티베트에서 무력 탄압이 없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원작 소설에도 없고 시기적으로도 맞지 않는 부분들이 '의도적'으로 삽입되었다는 것이 이 글의 포인트인 셈이지요. 그것은 티베트에 대한 서구적인 시선이 개입되었다는 것이고, 그 서구적인 시선이 다름아닌 '중국이 티베트를 무력으로 침공하고 삼켜버렸다'라는 것이지요.
폭력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것은 비단 티베트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닐 겁니다. Jennifer님이 말씀하셨듯이 끊임없이 역사에서는 이런 폭력이 반복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저는 「티벳에서의 7년」에는 미국과 중국의 관계로 인해, 중국이 '더욱 악의 축'으로 그려진 것이 아닌가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라는 질문으로 이어질 수 있겠지요. 이렇듯 영화 속의 그 시선에 대해 생각해볼 계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