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으로

만민공동회

coron 2008. 6. 18.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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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대한의 가장 천한 사람이고 무지몽매한 자입니다. 그러나 충군애국의 뜻은 대강 알고 있습니다.

나라를 이롭게 하고 인민을 편하게 하는 길은 관민이 합심한 이후에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1898년 10월 말 열린 2차 만민공동회에서 개막연설을 한 이는 놀랍게도 해방된 천민 박성춘이었다. 그

는 천민 중에서도 가장 천대받던 백정이었다. 게다가 단하엔 의정부 참정 박정양 등 정부 대표들도 참석

하고 있었다. 만민공동회의 힘은 귀천이 엄연한 신분사회에서 놀라운 민주성을 구현한 데서 비롯했다. 이

자리에서 결의한 헌의 6조는 정부 대표에 의해 고종에게 전달됐다. 내용중엔 ▲일본인에게 의부하지 말 것

▲외국과의 이권계약을 대신 단독으로 하지 말 것 ▲언론, 집회의 자유를 보장할 것 ▲칙임관의 임명은 중

의에 따를 것 등이 포함돼 있다. 일본을 미국으로 바꾸기만 하면, 최근 촛불집회의 요구와 다를 게 없다.

 

   1차 만민공동회는 3월 10일 종로 네거리(보신각 주변)에서 열렸다. 첫날 참여한 시민은 무려 1만명에 이

르렀다고 한다. 당시 한성 인구가 24~25만여명이었으니, 고종은 물론 주재 외교관들도 화들짝 놀랄 만도

했다. 고종은 러시아 군사교관 및 재정고문 철회와 부산 절영도(영도)반환이라는 만민공동회의 요구를 러

시아 쪽에 전달했고, 러시아는 이튿날 이 요구를 수용했다. 일본도 조차했던 월미도를 반환했다.

 

   그러나 조정의 수구대신들에게 만민공동회는 위험천만한 존재였다.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처음엔 독립

협회 지도부를 모조리 잡아 가뒀고, 이어 정치깡패(보부상 조직)를 동원해 폭력으로 진압했다. 약발은 커

녕 반발만 커지자 12월 말 결국 군대까지 동원했다. 하지만, 7년 뒤 대한제국은 일제 보호 아래 들어 갔고,

10여년 뒤 망했다. 이명박 정부는 어떤 길을 걸을까.

                                                                                출처 / 한겨레, 2008년 6월 17일, 곽병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