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으로

역사란 일종의 환상일까? 역사적 유환론

coron 2010. 5. 6. 16:06

짱구박사 잡동사니 연구소 pmpia

----------------------------------------

 

역사란 일종의 환상일까?


  있었던 사실들을 밝혀낸다해도 우리는 그 시절의 그 모습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 그 문화를 전승한 사람들조차 제대로 밝히기 어려운 모습을 역사라는 이름으로 재단하고 각색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있었다더라 정도의 수준을 넘어 “이랬기 때문에”라는 주를 달고나면 그 때부터 역사연구와 소설창작은 크게 다르지 않다. 소설가도 현장조사(고고학/답사)는 한다. 다만, 역사는 우리가 “사실이 그랬을 거라” 믿는 덕분에 Fiction 앞에 Non-을 붙일 여유가 있는 것이 소설과 다를 뿐인 것은 아닌가.

 

  역사에 흐름이라는 것이 있을까?

 

  흐름이라도 좋고 법칙이라도 좋지만, 그것이 우리가 “그렇게 믿고싶은 것”과 다르다면, 어처구니 없이 우린 말도 안되는 상상을 믿고있는 것은 아닐까? 실제로 우리는 그런 모습들을 곳곳에서 발견하지만 애써 외면해버리거나 왜곡한다. 그것도 역사의 이름으로 그런다. 이 정도면 역사란 믿음의 투영이 아닐까?

 

  이런 물음을 주위에 깔다보면, 나라, 겨례, 임금, 백성이라는 우스꽝스러운 관념들이 거품을 토해낸다. 깡패와 임금이 다른 것은 무언가. 나라와 패거리가 다른 것은 또 뭔가? 백성과 짐승들이 다른 것은 무언가? 이렇게 생각을 넓혀나가면, 우리 주위에 “역사”라는 이름을 붙이고 자라나는 모든 지식의 나무들은 일종의 조화자 시멘트로 만든 가짜나무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예를 하나 들자.

 

  우리의 고대사는 정말 빛나고 찬란했는가? 거기에 비한다면 우리의 근대사는 정말 초라하고 병들었는가? 이런 물음이 무의미하다면 어쩔 것인가? 아니라고? 비참하고 안 비참하고는 개개인의 경험에서 시작한다. 아무도 안 비참하다고 생각하는데 비참할리가 없다. 비참한 사람이 많이 사는 집단은 결국 비참한 겨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고대의 사람은 우리보다 덜 비참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빛나는 왕조의 영광을 위해 파리목숨보다 못한 많은 백성들을 희생시켜야했던 것이 뻔한 사실이라면, 우리가 외치는 저 과거의 영광은 바로 그 비참한 중생들의 삶을 “좋은 것”이라고 외치는 꼴이다. 도대체 나폴레옹과 히틀러와 히로히토와 치우한웅이 뭐가 다르단 말인가?

 

  나는 역사를 제가 믿고싶은대로 믿는 것을 “사적 유환론”이라고 부르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역사의 흐름을 결정하는 것은 생산한 물질을 둘러싼 인간계급간의 다툼이라는 “사적 유물론”에 맞서서, 그렇게 믿고싶은 사람 사이에 그런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사적 유환론”의 세계에서 “역사”란 없다. 시공이란 우리의 환상일 뿐이다. 천년과 하루가 영원이라는 표창으로 꿰인다.

 

  우리의 근대사를 비참한 것으로 여기는 “환상”만 없앤다면, 우리의 의식은 그리 나쁠 것도 없고 좋을 것도 없는, 천년전이나 별반 다르지 않는 지루한 일상들의 모임을 어렵게 유추하고 고민하고 반성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뭐 어떠랴. 존재하지도 않는 민족을 고민하고 찾아봐야 없을 역사의 정신을 억지로 만든다고 당장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그런 억지들은 모두, 지루하지만 개개인에게는 인생의 한 부분임이 틀림없는 소중한 시간들을, 집약된 욕망에 쏟아부어넣기 위해 동원하고픈, 망상가들의 조작이 아닐까? 개척정신? 민족의 얼? 그런 것이 당신과 상관있는 것이라고 믿게 만드는 그 고상한 철학과 사상들에 당신이 속아넘어가지 않는다면, 세상은 별로 변하는게 없진 않을까?

 

  이건 마치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벗고 다니는 것의 차이와 비슷하다. 남들고 함께 옷을 입고다니면 그럴 듯하고 남들과 달리 옷을 벗고 다니면, 어색하지만, 그렇다고 뭐 달라질 것은 없다. 물론 경범죄로 유치장에 들어가겠지만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면 옷벗고 사는 것도 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우리 주위에 “역사정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꽤 많다. 말하면 매국노에 빈 머리라고 놀림을 받을까봐 말은 안하지만, 술 잔 몇개 엎고나면, 그런 말도 안되는 “역사는 흐른다”를 못마땅한 정도가 아니라 일종의 “정신병”으로 치부하는 사람들을 나는 꽤 많이 본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대목은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기에 그들이 정상이고 “역사는 흐른다”고 말하는 사람이 비정상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치우천왕이 대륙을 주름잡았대서 우리 인종의 우수함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 사람들이 주장하는 이야기들이 그렇게 틀린 이야기도 아니라는 생각이 슬그머니 드는 것이다.

 

  패배주의와 회의론에 빠졌나? 그렇지는 않다. 작금에 벌어지는 일들을 살펴보면, 우리가 너무 순진하게 “역사의 발전”을 믿는 모양이다. 역사는 분명 발전이 아니라 퇴보라는 말이 어울린다. 우리는 제 살을 갉아먹어들어가고 있다. 제 살을 더 빨리 갉아먹는 것이 진보요 성장이요 발전이라면, 사전에다가 분명히 그렇게 쓸 일이다.

 

  아무도 없는 행성에 도착한 커크선장과 맥코이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이상한 신호음에 접한다. 이 무형의 괴물들과 사투를 벌이는 순간, 선장은 이들이 고도로 발전한 생명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런데 선장을 통해 이 문명의 패배를 이겨보려던 이 생명체가 전한 말은 이렇다. “처음에는 우리도 그것을 진화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알고보니 우리는 퇴화하고 있었다.”

 

  스타트렉의 용기는 여기까지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우리의 퇴보는 그 정도로 끝날 것 같지가 않다. 전 세계는 열심히 일하면서 아무 것도 얻지 못하는 대다수와 엄청난 규모의 판돈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노름판 자체를 붕괴시키고 다니는 소수의 마피아들로 양분되고 있다. 이들을 구분할 표식은 점점 더 심각하게 또렷해지고 있으며 얼마 안 가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 마피아들이 던져주는 먹이를 먹기 위해 줄지어서 다투어야할런지도 모른다. 지금도 그런 현상은 만연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국지적 기아현상”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갱 영화에서 보듯, 이런 판돈 쓸어가기를 계속하다보면, 그 와중에 한 마피아가 주머니 속의 총을 꺼내들고 쏘지 않는다는 법이 없다. 그리고 주머니 속에서 꺼내든 것이 꼬 총이어야한다는 법도 없다. 어차피 못 먹을 판돈이라면 노름판을 날려버려! 그걸 우린 핵무기라고 부른다.

 

  인류의 대부분은 제 정신으로 이렇게 산다. 그들은 그 노름을 일이라고 부르고, 그 노름판에 끼인 사람들을 거의 신으로 모신다. 하다못해 그 판돈의 주인을 모시는 비서나 기사가 되면 그것은 이 시대 최고의 성공이요 출세다. 개먹이 주듯 던져주는 돈이 아니라 주인이 배려하면 하루에 한 번쯤은 주인의 폼을 잡으로 흐뭇한 상상에 젖어있을 수도 있는 좋은 자리다.

 

  나머지 대다수의 사람들을 피골이 상접하게 놓아둔다면? 안된다. 그들도 사람인데 최소한의 생존과 함께 별 생각없이 이 상황을 받아들이도록 무언가 제공해야한다. 많잖아? 스타TV, 할리우드, 월드컵, NBA. 그것만 즐길 수 있다면 뭐, 인생이 어떤 식으로 흐르던 별 상관없다는 “매니아”들이 늘어간다. 우리도 그 중 하나가 아닐까?

 

  이제 이 빈정거리는 말투를 정리하자. 우리는 역사를 믿는가? 아무래도 그런 모양이다. 그러나 역사를 믿어도 되는지는 고민해야할테다. 그리고 아무래도 그 믿음이 배반당하는 지금의 느낌이 틀리지는 않은 듯해서 당황스럽다. 뭐 몇 백년 전의 조상들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이야기다.

 

  역사란 있는 것인가? 이 조잡한 일상들의 끊임없는 연속, 시공을 짜집기해놓은 우리들의 상상을 역사라 믿으며 우리는 환각상태에서 헤매고 있지는 않은가? 우연을 필연이라 우기며 하늘에서 떨어진 날벼락을 법칙이라고 추인하는 것은 아닐까? 노름하는 법칙? 그래, 그런 건 있는 것 같아... 
                                                                                                                1998년 6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