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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태자

coron 2010. 5. 6. 18:30

마의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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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태자(麻衣太子)는 신라 제56대 왕인 경순왕죽방왕후 박씨의 장자 김일(金鎰)을 가리키는데, 신라-고려 전환기에 신라부흥운동을 하였던 경순왕의 태자 형제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마의태자는 김일(金鎰)로 알려졌으나, 확정적으로 고증되지는 않았다. 신라삼성연원보에는 마의태자가 두명으로, 석씨 소생의 막내 김분(金奮), 박씨 소생의 장자 김일(金鎰)이라고 한다. 마의태자의 이칭은 개골산에서 (麻)로 옷을 입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긍정적인 명칭은 아니다.

목차

[편집] 생애

935년, 경순왕 9년에 신라는 군신회의를 열고 논의하여 고려에 항복하기로 결장하였다고 전한다. 고려는 930년에 후백제을 멸망시키고 사실상 후삼국을 통일한다. 후백제 정벌 이전에 경순왕이 자발적으로 고려에 나라을 양국했다는 내용은, 정사 삼국사기에 내용과도 배치되는 내용이다. 경순왕과 신라 호족이 고려을 도운 것은 후백제 정벌을 지원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신라는 고려을 이용하여 후백제을 견제하려는 목적이 강했으나, 고려는 정벌한 후백제는 한반도 대부분을 장악했기 때문에 개성에 도읍하고 고려을 세울것을 결정하였으며, 고려 태조는 후백제을 정벌이 끝난 이후에 경순왕을 만나 고려 개국을 통보하였다. 정사에는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한 년도가 935년으로 나오는데, 후백제 멸망 년대 930년 사이에 5년이라는 시간차가 있는데, 이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명확하지 않다.

경순왕이란 명칭은 신라 시대에 명칭은 아니고, 경순왕이 사망하고 붙여진 이름이다. 경순왕의 후삼국 시대 명칭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김부대왕이었다. 강원도에는 김부령, 김부리, 김부대왕동, 김부대왕각등, 관련한 이름들이 있다. 역사스폐셜에서는 김부대왕 김부가 경순왕이 아니고 마의태자이며, 김부의 부 (富)와 김일의 일(鎰)은 글자로만 본다면 무관하지만, 의미가 상통하므로 김부와 김일이 동일인이라고 역사스페셜에서는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해석은 과학적이지 않고, 실증적이지도 않다. 동시대의 인물이 한글, 한자가 동일하더라도 동일인이 아닌 경우가 많은데, 의미가 상통하기 때문에 동일인이라는 해석하는것은, 근거가 희박하다.

삼국사기 권2 김부대왕(경순왕) 조(條)에는 "태자는 금강산으로 들어가 베옷과 채식으로 한 세상을 마쳤고, 계자(季子, 막내 아들) 김굉은 머리를 깎고 화엄종에 속하법는 승려가 되어 법명을 범공(梵空)으로 하고, 경북 성주에 있는 법수사에 귀의했다", 라는 내용이 있다. 경순왕이란 명칭은 사후에 붙여진 이름으로, 생전에는 경순왕으로 불려지지 않았으며, 금부대왕으로 불리웠다. 그러므로 강원도 김부리, 김부대왕동, 김부대왕각이 마의태자 보다는 김부대왕을 가리키는 명칭일 개연성이 많다. 마의태자가 김부대왕이란 명칭을 계승하였을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고증할수 없으며 일반적이지 않다.

마의태자가 갔다고 하는 개골산(皆骨山)의 개골이라는 이름은 모든 것이 해골이 된다는 죽음의 골짜기를 의미한다. 개골산은 겨울 금강산 명칭이라는 단순한 계절적 명칭이 아니고 죽음의 골짜기 산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금강산에게 고려 관군와 마의태자가 치열하게 투쟁하였고, 그 과정에서 많은 인명이 사망하여, 개골산이란 이름이 붙여졌을 가능성도 있다. 또는 고려 중기 이후 반란자들의 유배지로 사용되어 죽음의 골짜기 산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는 견해도 있다.

강원도 인제 김부리, 김부대왕동, 한계산성, 권금성에 김부대왕과 마의태자가 살았다는 전설이 있다. 김부리에는 마의태자 유적지비가 있어 이곳이 마의태자와 깊은 관련이 있는 유적지임을 알리고 있다. 마을엔 마의태자에 대한 전설들이 많이 남아있는데 마의태자가 옥새를 숨겼다는 '옥새바위', 수레를 타고 넘었다는 '수 거너머', 마의태자 충신 맹장군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이름 '맹개골', 군량미를 모아 저장하던 곳이라고 붙여진 '군량리' 등이 있다. '다무리'라는 지명은 고구려말로 국권 회복, 광복이라는 뜻으로 마의태자가 살았다는 전설과 관련 있다고 전하기도 한다. 김부대왕각 제단에는 철마상(鐵馬像)이 배설되어 있었다.

대관령으로 대표되는 태백산맥을 넘어 동해안으로 가는 진부령은 본래는 김부령(金富嶺)이었다고 전하는데, 김부령이 명칭이 경순왕의 이름 김부, 또는 경순왕의 명을 받아 신라부흥군을 이끌었을 마의태자가 넘던 고개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견해가 있다. 김부리 인근의 갑둔리(甲屯里)는 갑옷 갑(甲)과 진칠 둔(屯)으로 군사적인 요소가 있으며, 항병골이라는 골짜기 이름도 신라부흥운동과 관련된 지명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

마의태자의 유적지 갑둔리 5층석탑에 '금부수명장존가(金富壽命長存家)'라는 비명(碑銘)과 함께 “요(遙) 성종 태평16년 병자(서기 1034년, 고려 정종 2년)”라는 간지(干支)가 발견되엇으며, 석탑에 새겨진 명문을 판독해 보니 "김부( 金富)라는 사람의 수명이 오래되고 또 집안이 오래도록 잘 되기를 기원하며 이 탑을 만들었다"고 전하고 있었다. 감둔리 5층 석탑은 경순왕, 또는 마의태자가 이곳에 한동안 머물렀던 영향으로 그 지역 사람들이 만들었다는 견해가 있으며, 역사스페셜에서는 석탑에 새겨진 부 (富)와 일(鎰)은 글자로만 본다면 무관하지만, 향찰 표기법을 적용하여 김일과 김부는 동일인이라고 주장하였으나, 고증 증거가 없는 추측에 불과하다. 경순왕은 삼국사기에 자발적으로 나라을 넘겨주고, 스스로의 의지로 개성까지 신하들을 이끌고 가서 고려 태조의 신하가 되었다고 하는데, 상식적이지 않은 요소가 많으며 고려 개국의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한 서술로도 볼 수 있다. 전설대로 금부대왕이 김부리, 한계산성, 권금성에 머물렀다면, 금부대왕이 개성으로 갔었던 것은 고려 관군에 패해서 압송된 것이지, 왕건의 신하가 되기 위해 개성으로 간것은 아니다.

신라삼성연원보 내용 가운데, "그 해 10월 경순왕이 고려에 귀순할 때 석씨의 막내 분(奮)과 박씨의 맏아들 일(鎰) 두 분이 극력 간(諫)하다가 왕이 들어주지 않자 어전에서 통곡하더니 영원히 이별하고 함께 개골산에 들어가 바위를 집으로 삼고 마의 초식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라는 내용이 있다. 위 내용에 이상한 점은 신라 수도 금성에서 개골산은 상당히 거리가 먼 지역인데, 마의태자 유적이 있는 김부리을 건너 뛰고 바로 금상산으로 두명의 태자가 떠났다고 기술하고 있다. 김부대왕과 두명의 태자가 있었던 지역을 신라 수도 금성이 아닌, 경순왕과 마의태자 유적지 김부리로 설정한다면 태자들이 금강산으로 떠난 상황이 납득이 된다. 김부리에 있었던 신라 태자들은 고려 관군에게 포위됐으며, 이 과정에서 일부는 달아났고, 일부는 압송되었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이며, 경순왕이 고려에 귀순했다거나 마의태자가 극력 간했다는 내용은 드라마적으로 후대에 각색했다고 판된되는 대목이다. 김부대왕이 자발적으로 고려에 귀부했다는 것은 고려 조정의 입장에서 각색한것으로 보이며, 마의태자가 김부대왕의 반대을 무릅쓰고 극력 간하다가 떠났다는 내용은 창작하여 덧붙여진 내용으로 판단되는데, 현실은 드라마적이지 않다.

[편집] 마의태자와 개념

일반적으로 마의태자는 경순왕의 맏아들 김부(金富), 김일(金鎰)을 지칭하며, 넓게는 김일과 함께 신라 국권 회복 운동을 하였던 형제들을 포함하는 명칭이다. 신라국권회복운동은 고려 개국 이후 200년 이상 지속됐다고 하며, 1011년 여진의 함선 100여 척이 경주 지역에 출몰했다는 했다고 전하기도 한다. 고려 초기 항려 세력은 신분을 숨기고 사찰을 거점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승려로 위장하였거나, 실제로 승려가 된 경우도 있었다. 신라삼성연원보(新羅三姓淵源譜, 1642년 간행)에는 신라가 멸망했을 때 자결한 왕자도 있었다고 한다.

마의태자의 의미는 개골산에서 마(麻)로 된 옷을 입고 풀을 뜯어 먹고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긍정적인 명칭은 아니다. 고려는 신라 부흥의지을 완화시키기 위해 마의태자가 금강산에서 사망했다는 사실을 내외적으로 알리기 위해, 인위적으로 태자릉(太子陵)을 조성했다는 만들었다는 견해도 있는데, 명확하지 않다. 김부리(金富里), 김부대왕동(金富大王洞)에 실제로 경순왕이 살았다는 견해도 있다. 신라가 고려에 평화적으로 나라을 넘겨주었다고 알려졌으나, 삼국사기의 서술은 고려 개국의 당위성을 서술하는 목적이 강했기 때문에, 실제 사실과는 다를 수도 있다. 처음엔 경순왕과 신라계 호족은 왕건을 견휜을 견제하기 위한 지방 호족 세력으로 인식하였는데, 견휜을 정벌한 왕건의 세력이 확대되고 한반도의 패권이 왕건에게 넘어가게 되면서, 왕건은 경순왕을 만나 고려을 세울 뜻을 내비쳤으며, 개성에 도읍하고 고려을 개국하였다. 경순왕이 스스로 고려 태조을 찿아가 귀부했다는 내용은 고려 개국의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한 서술이다.

김부(金富)는 마의태자로 전하는 인물로, 강원도 김부리에서는 김부(金富)대왕으로 지칭하여 전승되었다. 김부는 마의태자 김일로 알려졌으나, 삼국사기에 경순왕을 금부대왕으로 지칭하고 있기 대문에 경순왕일 가능성도 있고, 석씨 소생의 아들 김분(金奮)일 가능성도 있다. 또는 경순왕과 무관하게 강릉의 호족, 궁예 후손의 일파일 가능성도 있다. 강원도 김부리 5층 석탑에는 금부수명장존가(金富壽命長存家)'라는 비명(碑銘)과 함께 “요(遙) 성종 태평16년 병자(서기 1034년, 고려 정종 2년)”라는 간지(干支)가 발견되었는데, 1034년은 마의태자가 활동하던 시대보다 후대여서, 김부(金富)가 마의태자와 무관한 사람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김분(金奮)은 삼성연원보에 경순왕과 송희부인 석씨의 아들이다. 항려 세력이 패배한 이후에는 구체적인 기록이 전하지 않았고 경주김씨 족보에서도 누락되었는데, 평안도에서 간행된 경김족보(慶金族譜)에서 기록이 발견되었다. 신라삼성연원보에는 개골산으로 간 왕자가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며, 마의태자와 김분(金奮)이라고 한다. 김분은 석씨 소생의 아들로, 박씨 소생의 김일과 비슷한 시기에 출생한것으로 추정된다. 김분은 삼성연원보에는 금강산으로 떠났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김부리에서 사망해다는 설도 있다. 삼국사기에는 김분에 관련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실존 인물이 아니거나, 경순왕이 개성으로 압송될때 다른 곳으로 피신, 또는 사망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김일(金鎰)은 경순왕과 소원왕후 박씨의 맏아들이다. 강원도 김부리 금부대왕각 내부에는 신라경순왕태자김공일지신(新羅 敬順王太子金公鎰之神)이라는 위패가 모셔져 있는데, 본래 위패 내용은 신라경순왕제일자지신위(新羅敬順王第一子之神位), 또는 경순왕제일자김부지신위(敬順王第一子金富之神位)로 새겨져 있었으나 훗날 어느 후손에 의하여 지금의 내용으로 바뀌다고 한다. 강원도 김부리에서는 마의태자 신위에는 이름이 부(富)로 되어 있는데, 김부의 부 (富)와 김일의 일(鎰)은 글자로만 본다면 무관하지만, 의미가 상통하므로 김부와 김일이 동일인이라고 역사스페셜에서는 주장하기도 하였다. 신라-고려 시대에는 본명인 명(名)과 손위 사람을 부르는 자(字), 누구나 쉽게 부를수 있는 호(號)에 해당하는 아호(雅號), 당호(堂號), 필명(筆名), 별호(別號), 택호(宅號)와 시호(諡號) 예명(藝名), 넓은 의미에서 호(號)에 해당하는 법명(法名)등이 었어서, 마의태자의 이름이 두가지로 나타난다는 견해가 있으나, 고증할 수 없다. 경순왕은 927년에 죽방앙후와 결혼하였는데, 이때 김일이 태어났다면 935년 신라가 멸망할때 나이는 8살이었다. 8살짜리 아이가 경순왕 결정을 반대하다가 개골산으로 떠났다고 믿기는 힘들다. 김일이 마의태자라는 등식이 성립하려면, 석씨 소생이거나, 경순왕이 927년 보다 최소 10년전에 죽방왕후와 결혼하고 김일을 낳았어야 맞는다. 김일이 장성하여 금강산으로 떠났다고 가정할수는 있지만, 이 경우 강원도 김부리 마의태자 유적과는 관련성을 찿을수 없다. 김일이 실제 마의태자이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김굉(金鍠), 또는 김황(金皇)은 김부대왕의 계자이다. 김굉은 신라가 멸망하자 금강산, 강원도 김부리에서 항려운동을 하였다. 김굉은 태자부가 김부리, 또는 개골산에서 고려 관군에게 패배한 뒤에 승려가 되었다고 전하고 있는데, 불교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항려 지지세력을 구축하기 위한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고려 건국 200년 이후까지 항려 운동은 계속되었으며, 항려 세력은 대부분 승려로 위장하였는데, 승려로 위장하면 사찰을 거점으로 활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금시조는 승려 출신이었다고 하는데, 마의태자와 관련한 인물 가운데 승려가 된 인물은 김굉이다. 김굉은 신라 후기에 울산 지역을 다스리는 호장이었는데, 신라가 멸망하자 신라국권회복 전쟁에 참가하였다. 김굉은 금강산에서 신라 태자부가 고려 관군에 패배하자, 두명의 아들과 이별하고 승려가 되어 항려운동을 추진하다가 입산하였으며, 이후 기록에서 사라졌다.

김교(金較)는 마의태자의 아들로 전하는데, 후대에 통천군에 봉해졌다. 통천은 강원도 북단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함경도에 근접한 지역이다. 통천은 강원도 김부리와는 지역적으로 거리가 멀고 마의태자가 살았다는 금강산과 가까운 지역이다. 한국에는 마의태자 후손으로 전하는 여러 성본이 있으나 통천을 제외하고는 강원도에 위치하고 있지 않다. 지역적 접근성으로 본다면 김교(金較)가 마의태자 후손일 가능성이 가장 많지만, 마의태자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단정할수는 없다.

[편집] 금나라와 관련성

금태조가 금나라을 건국할 때 동여진 호십문이 갈소관부을 이끌고 금태조에 귀순하면서, 선조 3형제가 이별하였고, 자신은 아고내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송막기문에는 금시조의 이름을 감복(龕福, 송나라인이 한자로 음역화한 이름), 만주원류고에는 합부(哈富, 청나라인의 발음), 원나라 때 간행된 금사에는 함보(函普, 원나라인 한자로 음역화한 이름)라고 적고 있다. 만주원류고는 금사보다 후대에 간행되었지만, 청나라 왕족이 직접 함보(函普)을 함부(哈富)로 정정하였기 때문에, 합부(哈富)가 금시조의 본래 이름에 근접한 발음으로 추정된다. 금시조의 이름은 시대에 따라 감복, 합부, 함보로 변형되고 있다. 마의태자와 금시조와 관련있다고 전제한다면, 마의태자로 전하는 인물들의 이름은 외자이기 때문에, 감복, 합부, 함보의 감(龕), 합(哈), 함(函)은 실제로는 성이였을 개연성이 있다.

고려 초기 여진족은 함경도와 평주, 백두산 전방에 할거 하였는데, 고려는 거란와 동맹을 맺고 여진족을 봉쇄하는 정책을 사용하였다. 고려 외교관 서희와 거란의 협약은 거란과의 전쟁을 피하고, 고려에 위협적인 여진족을 봉쇄하기 위한 양면적인 정책으로, 고려에 입장에서 보면 송나라와 외교을 단절하는 대신 북방의 땅을 얻고, 여진족을 몰아낼수 있는 1석2조의 장점이 있었다. 거란은 약간의 땅을 고려에 떼어주는 대신에, 송나라와 고려의 동맹을 분리시켜 송나라을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하여 서희의 제의을 받아들였다. 거란과 고려의 협상으로 여진족은 거란과 고려, 두나라에게 동시에 압박을 받게 되어, 일부는 백두산 후방으로 밀려 차후에 완안부로 이동하였고, 함경도, 평주, 연해주에서 개별적인 활동을 하였다. 금사에는 금시조가 아청(완안부)로 떠날때, 형 아고내는 불교을 좋아해 고려에 남았으며, 그의 후손 호십문이 갈소관부을 이끌고 금태조에 귀부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고려사 예종 10년(1115) 3월조에 보면 이런 기사가 나온다. '생여진 완안부의 아골타가 황제를 일컫고 국호를 금이라 했다. ‘평주(平州) 승(僧) 금준(今俊)이 여진에 도망해 들어가 아지고촌(阿之古村)에 거주했으니 이가 금의 시조라고 서술하고 있는데, 금준(今俊)은 성을 김(金)으로 적고 있지는 않기 때문에, 금준(今俊)은 속명이거나, 당시 발음을 후대에 음역한 표기로 여겨지고 있다. 고려사 예종 10년(1115) 3월조에 보면 이런 기사에 평주 승 김행(金幸)의 아들 극기(克己)가 처음에 여진의 아지고촌에 들어가 여진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으니 고을(古乙) 태사(太師)라 하고 고을이 활라(活羅) 태사(太師)를 낳고 활라가 아들이 많아 장자를 핵리발(劾里鉢)이라 하고 계자(季子)를 영가(盈歌)라 했는데, 영가가 웅걸(雄傑)이어서 중심(衆心)을 얻었다고 한다. 아지고촌에 들어간 인물의 이름이 제각각이기 때문에 동시대성, 실존성은 명확하지 않으며, 서로 다른 인물의 이야기가 후대에 혼용되었을 개연성도 있는데, 마의태자와의 관련성은 고증되지 않았다.

한계산성은 마의태자가 웅거했다는 설악산에 존재하는 성으로, 양양의 전진사지 유물이 출토되고 있는데, 전진사지는 8세기에 창건한 성으로, 사회 혼란기에 도적떼가 설악산 한계산성을 무대로 활동하면서 신흥사와 진전사를 노략질하여 결국 폐사되었으며, 진전사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예전에 도적굴이었다는 동굴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편집] 마의태자 이야기 고찰

마의태자라는 의미는 신라-고려 전환기에 신라 방계 왕족을 포함하여 신라국권운동을 하였던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추정되는데, 오늘날 전해지는 후대에 추가되거나 혼용된 내용도 있을수 있고, 전혀 관련없는 사실도 썩여있을 수 있다. 강원도 김부리의 유적은 마의태자와 관련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고려는 초기부터 거란, 몽골과 대대적인 전투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강원도는 방어 기지 역활을 하게 되었다. 특히 몽골과의 세력 다툼 과정에서 강원도 지역은 중요한 역활을 하였다. 한계산성은 몽골과 대립하는 상황에서 벽돌로 보강하여 쌓아졌고, 권금성은 이때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강원도 여러 유적을 마의태자와 연결하여 추론하는 견해가 있지만, 몽골과의 전쟁에서 생겨난 지명, 유적일 가능성도 함께 다루어져야 한다.

마의태자는 경순왕의 장자 김일(金鎰)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경순왕이 죽방왕후와 927년 결혼하였다면 김일(金鎰)은 신라가 멸망할때 8살의 어린 아이였다. 8살의 어린 아이가 경순왕의 뜻을 반대하다가 개골산에 들어간다는 내용은 개연성이 없다. 김일(金鎰)이 마의태자라는 등식이 성립하려면, 본래 석씨 소생으로 신라가 망할때 최소 18세였거나, 또는 성장하여 금강산으로 갔다고 서술되어야 맞는데, 전하는 기록은 이것과는 다르다. 삼국사기에 김일(金鎰)이 어머니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밝히고 있지 않다. 삼국사기에 김부대왕의 계자 김굉이 항려운동을 했다는 기록을 근거하면 경순왕과 죽방왕후 결혼이 927년 이전에 이루어졌거나, 본래 박씨 소생이 아니라는 결론이 내려진다.

강원도 지역은 전통적으로 통일 신라 이후 거점 수도을 만들었을 정도로 강원도에는 신라 방계 왕족들이 많이 살았고, 강릉 김씨가 세력화한 지역이며, 궁예의 태봉국도 강원도 철원에 존재하였다. 김부대왕의 계자 김굉(김황)이 울산 호장으로 있다가 신라가 멸망하자 강원도에 들어가 항려 운동을 한 사실을 보면, 신라가 멸망하자 반고려 의식이 강했던 신라 방계 왕족들이 강원도에 집결했다고 유추할수 있는 대목이다. 이와같이 강원도에는 항려운동에 참가하였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금강산에 갔다는 마의태자가 어느 계통인지 분명하지 않다.

마의태자가 금시조인가라는 문제는 오래전부터 제기되었다. 마의태자가 하나의 개인이 아닌 항려 운동을 하였던 모든 신라 왕족으로 설정한다면 금시조가 마의태자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개념은 타당하다. 공식 기록은 아니지만 신라 왕족들은 강원도 금강산에서 고려에게 패배한 이후에 북진하였고 통천을 지나 함경도로 들어갔는데, 신라 태자부는 말갈족과 결혼하면서 여진족으로 정체성이 바뀌었으며, 초기에는 고려 전복을 위한 정치적인 활동을 하다가 고려와 거란의 협공으로 여진족의 일부는 백두산으로 넘어 완안부 아청으로 갔다는 추정이 예상 가능한 금나라 건국의 정황이다. 고려 초기 함경도는 말갈족의 살았던 지역으로 고려 영토가 아니었으며, 신라 시대에도 영토에 포함되지 않는 국경 지역이었다.

여진족은 말갈족을 기본으로 하고, 퉁구스, 신라인, 거란인이 합하여 출현한 민족이다. 금사, 송막기문, 만주원류고에 서술된 것과 같이 신라인이 말갈족, 거란인과의 결혼을 통하여 여진적으로 정체성이 바뀌었다고 하여도 여진족은 신라인이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민족의 개념은 변화하는 것이고, 그들이 한반도을 떠나 완안부로 이주하여 새로운 민족으로 거듭았다. 만주원류고, 송막기문등에는 여진족의 추장이 신라인이었고, 금의 국호가 신라왕성에서 왔다는 내용이 있지만, 만주족이 조상을 미화하기 위하여 억지로 금의 국호와 신라 왕성을 연결했다는 반론도 있다. 이런한 반론은 고증되지 않았지만,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민족이란 부계 혈통이 전부가 아니며, 전체적으로 여진족의 정체성은 말갈족에 근접한 것도 사실이다.